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Mar 03. 2020

41. We are not 7, with you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1



곧 만 세 살이 되는 조카의 말이 요즘 부쩍 늘었다. 유튜브나 텔레비전, 책에서 보고 배운 지식을 아직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곧잘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지진이 날 땐 책상 밑으로 숨어야 한다"든가, "이모 방 침대 밑엔 먼지가 많다"든가, "일어나서 같이 춤춰" 같은 말이 문장으로 뱉어지면 언제 이렇게 컸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 조카가 최근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는 '코로나 바이러스'다. 엄마가 혼자만 마트에 얼른 다녀오는 것도, 긴급 재난 문자가 크게 자주 울리는 것도, 텔레비전에 앰뷸런스가 많이 나오는 것도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4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4회 개최될 예정이었던 방탄소년단의 <Map of the soul> 콘서트가 코로나 19 확산 방지 이유로 취소됐다.


혹시 잊어버릴까 탁상달력에 형광펜으로 크게 체크해놓고, 혹시 늦을까 핸드폰 알람을 설정해놓고 서버가 터져 무한 새로고침을 한 시간 반을 해가며 참전했던 티켓팅이 끝난 지 고작 3일 만의 공지였다. 열 일하는 인터파크 덕에 콘서트 취소 공지가 업로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라운드 당첨 좌석 취소 알림이 왔다. 새벽에 북미 콘서트 티켓팅을 순조롭게 성공한 뒤 콘서트 응모 당첨까지 확인해 내가 똥손이 아님을 자축한 게 고작 3주 전의 일이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내 손으로 티켓 취소를 다 해볼까 싶어 티켓팅에 성공한 티켓들은 직접 취소했고, 환불될 티켓 금액 중 일부는 윤기가 코로나 19 예방 및 피해복구를 위해 1억 원을 기부한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했다. 첫 콘 티켓팅에 실패해 이틀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그 한 장의 취켓팅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날 밤은 깡 와인을 부어라 마셔라 디오니소스 하는 바람에 고단한 잠을 청해야 했다. 


부은 눈을 뜬 토요일 아침. 오늘은 방탄소년단이 출연하는 음악 방송도 없는 데다 쓰린 속 붙잡고 하루 종일 멍하게 있을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 마음먹고 채비를 했다. 마침 제대로 자리 잡고 집중해서 보고 싶은 책 한 권도 있었다. 지난 태형이 생일 때 컵홀더 투어로 방문했던 카페 중 공간이 넓고 층고가 높은 데다 의자와 테이블이 적당한 높낮이였던 한 곳이 기억났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집중해 책을 읽기 괜찮을 것 같았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ON>이 자동으로 흐르는 차가 주차장을 미끄럽게 빠져나왔다.


Q. 이번 앨범이 그룹의 커리어에 대한 러브송처럼 느껴지는데, 의도한 것인가요?


A. 네 정말 그렇죠. 사랑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할 땐 그 무언가나 누군가가 가진 역사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니까요. 그게 그림자일 수도 어두운 면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네, 저희 커리어에 대한 러브송이 맞습니다. / 20.02.22 billboard 남준의 인터뷰 中 


남준의 인터뷰처럼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 <Map of the soul : 7>에는 멤버 자신들의 이야기가 가득 녹아 있다. 언제나 지금을 회피하지 않는 멤버들답게 자신들의 Persona와 Shadow, Ego가 군데군데 파묻혀 있다. 힘들지만 괜찮아졌고, 아직도 극복해나가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득문득 아프지만 그래도 내 편인 사람들이 많아 행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고 온 트랙을 통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의 노래를 처음 선보일 서울 콘서트를 기대했던 건데. (잠깐 눈물 좀 삼키고)


분위기 있는 곡들이 연달아 흘러나오고 있는 카페지만 양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읽고 있던 책도 잠시 덮었다. 5월부터 시작되는 투어는 아직 변동이 없고, 그전에 이 바이러스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그래야만 한다). 티켓마스터 사이트에 로그인 한 뒤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뉴저지, 시카고 콘서트 티켓을 괜히 한 번 더 확인했다. 사파리 창을 닫은 뒤 음악 검색에 숫자 7을 넣었다. 몇 개의 앨범을 지나쳐 <Map of the soul : 7>을 클릭했다. 노래의 순서를 가늠할 수 없게 임의 재생을 눌렀다. <Black Swan>이 첫 곡으로 흐른다.


<Map of the soul : 7>의 전체 곡이 공개되는 날, 조금 이른 퇴근을 한 참이었다. 트레일러로 먼저 공개된 윤기 솔로곡 <Interude: Shadow>와 선공개된 <Black Swan>만 봐도 이번 앨범은 평생 내게 남을 곡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오늘을 기념할 와인을 사기 위해 대형 마트에 들렀다. 카트에 간단한 안주거리와 와인을 담으며 쇼핑하다 보니 노래가 공개될 시간에 가까워졌다. 마트 한 구석에서 카트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여섯 시에 맞춰 공개된 타이틀곡 <ON>의 키네틱 매니패스토 필름 뮤직비디오를 봤던 그때의 기분을 나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결과물을 위해 준비했을 시간의 두터운 겹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면을 집중해서 보다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던 그 순간을.


그 이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듣고 있는 앨범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 운 노래들이기에 다른 유행가 듣듯 쉽게 흘려들을 수가 없다. 가사를 오늘 또 꼭꼭 씹어가며 듣는다. 


  나의 바람대로 높게 날고 있는 순간 저 내리쬐는 빛에 더 커진 그림자

  가장 밑바닥의 나를 마주하는 순간 공교롭게도 여긴 창공이잖아


나는 감히 가늠하지 못한다. 윤기가, 멤버들이 서 있는 높이를. 


  웃어봐 뭘 망설여 네가 바라던 게 이런 게 아니었니

  울던가 뭐가 두려워 네가 원하던 게 이런 게 아니었니

  근데 뭐가 문제야 즐겨 아님 놓던가 싫어?

  그럼 달리던가 뭐 멈추던가 한 가지만 하라고 징징대지 말고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안팎에서 쏟아질 이 가시들의 아픔을.


  그래 나는 너고 너는 나야 이젠 알겠니


나는 감히 이 높이와 가시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윤기는 이 이야기를 팬들에게 건네도 괜찮을 거라고, 완벽히 해석할 순 없어도 온전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이해 가능 범주에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아프게만은 듣지 않는다. 나는 너고 너는 나야 이젠 알겠니.


  아 대체 욕 좀 먹는 게 왜 잘 벌잖아 또 징징대 왜 그 정돈 감수해야지 에헴

  에헴 에헴 에헴 에헴 니네 에헴 에헴 에헴 에헴

  나 시켰어봐 다 참아 니네 에헴 니네 에헴 에헴 에헴 에헴

  나 시켰어봐 그냥 에헴 비헴 에헴


어느 드라마 속 톱스타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대사가 기억난다. 사람들은 다 내 앞에선 나를 좋아한다 하고 뒤에선 나를 욕하는지 모르겠다던. 하루 종일 사과 하나 먹고 버텼지만, 하도 욕을 먹어 배가 다 부르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달린 눈을 한 채 뱉은 대사가 그랬다. 익명에 가려 쏟아지는 무책임한 글들이 향하는 대상에 방탄소년단도 예외는 없다. 욕 좀 먹는 게 뭐 어떠냐고, 돈 잘 벌지 않냐고, 근데 그 정도밖에 못하냐고, 나는 그것보다 훨씬 잘하겠다고 명분까지 내세운다. 


  그래 욱 욱 욱해라 욱 재가 될 때까지 그래 욱해라 욱

  그래 욱 욱 욱해라 욱 부러질 때까지 그래 욱해라 욱

  나는 욱해 욱해 나는 욱해 욱해

  나는 악의에 가득 찬 분노에 분노해

  나는 꺼져야만 했던 그 분노에 분노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누구의 찰나에 누구 순간이 되고 누구의 분노에 누구 목숨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한다. 우리도 욱하고 화난다고. 발화되지 않았어야 할 분노에 분노하고, 악의만 가득 찬 분노에 분노한다고. <MIC Drop>이 헤이러들(Haters)를 향해 트로피들로 가득한 백을 보여주며 '그래 봐야 우리 잘할 거야'라고 고상하게 인사했다면, <욱>에서는 '너네 까부는 거 우리도 좀 짜증 나네?'라고 턱 짓하는 느낌이다. 헤이러들은 이런 노래 안 들은 척할 테지만 우리는 크게 부를 것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래도 우리도 욱해. 욱한다고. (역시 이 노래는 얼른 콘서트에서 떼창 하고 싶다.)


  그런 날 있잖아 이유 없이 슬픈 날 몸은 무겁고 나 빼곤 모두 다 바쁘고 치열해 보이는 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벌써 늦은 것 같은데 말야 온 세상이 얄밉네


나도 곧잘 착각한다. 스케줄이 끝나고,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멤버들의 차 안은 고요한 행복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내가 방탄소년단으로부터 받는 행복이 멤버들 자신의 것이라고 곧잘 착각하고, 언제나 함께 해주는 많은 팬들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지금이 즐거울 거라고 곧잘 치환해 판단한다. 집에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으면 그저 20대의 평범한 한 사람들임을 나조차도 곧잘 잊는다. 멤버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남들과 비교도 하고, 지금이 맞는 건지 고민도 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는구나, 첫 가사가 시작될 때마다 다시금 생각한다. 어쩌면 팬인 내가 가장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조금씩 박자가 미끄러져 쉬운 표정이 안 지어져 익숙한 가사 자꾸 잊어

  내 맘 같은 게 뭐 하나 없어


무용을 했던 습관이 남아 있어 안무 영상을 볼 때마다 자신의 박자부터 체크하는 지민이는 조금씩 박자가 미끄러지는 것이, 잘 지어지지 않는 표정이, 늘 불러왔던 노래 가사를 잊는 자신을 채찍질한다. 항상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지친 자신에게 괘념치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내 맘 같은 게 뭐 하나 없다지만 그 속상함의 원인이 팬들에게 선보이는 무대와 촬영을 더 잘하지 못해서라니. 마음이 쓰리다.


  두 손 모아 기도하네 내일은 좀 더 웃기를 For me 좀 낫기를 For me

  이 노래가 끝이 나면 새 노래가 시작되리 좀 더 행복하기를


성공보단 성취, 목표보단 목적이라던 윤기의 단호한 표정이 스친다.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하고, 시차에 적응될 새 없이 수 십 번 비행기를 타느라 몸이 고달프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가 싶어 지더라도 결국은 다시 행복해지기를 기도하는, 기꺼운 멤버들의 마음을 읽는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가사처럼 될 것이다. 내일은 지금보다 좀 더 웃고 좀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나아지는 일들만 남아있을 것이다. 


  유난히도 반짝였던 서울 처음 보는 또 다른 세상

  땀에 잔뜩 밴 채 만난 넌 뭔가 이상했었던 아이

  난 달에서, 넌 별에서 우리 대화는 숙제 같았지

  하루는 베프, 하루는 웬수 I just wanna understand

  Hello my alien 우린 서로의 mystery 그래서 더 특별한 걸까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는 사이. 평생 우연히 한번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이. 동갑내기 지민이와 태형이는 그랬다. 부산과 거창(대구), 사는 곳도 다르고 무용과 색소폰, 하는 것도 달랐던 두 사람이 그 모든 '없었을' 이유를 건너 이렇게 만났다. 형들 앞에서 까불거리고 틈만 나면 장난치던 10대 후반의 치기 어린 꼬맹이 둘은 7년의 시간이 지나 이 함성이 멎게 되더라도 서로의 곁에 오래 있자며 약속하는 근사한 20대 중반이 되었다. 


  우리 교복 차림이 기억나 우리 추억 한 편 한 편 영화

  만두 사건은 코미디 영화 yeah yeah

  하교 버스를 채운 속 얘기들 이젠 함께 drive를 나가

  한결같애, 그때의 우리들 

  내 방의 드림캐쳐 7년간의 history 그래서 더 특별한 걸까


  네 새끼손가락처럼 우린 여전해 네 모든 걸 알아 서로 믿어야만 돼

  잊지 마 고맙단 그 뻔한 말 보단 너와 나 내일은 정말 싸우지 않기로 해


만두 하나를 먹는 것에도 의견이 갈리는, 참 다른 두 사람이었다. '안무하면서 먹겠다'와 '안무 연습 다 끝내고 먹어야 한다'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울 정도였다. 서로가 외계인처럼 이질적이었다. 같은 반에서 만난 친구였다면 서로의 다름을 문제 삼아 급우 이상 이하도 아닌 사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고, 같이 연습실 가고 같이 집에 돌아와야 했다.같은 동료가 있었고, 매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전체의 일상이었다. 무서운 꿈을 꿨다는 태형이가 생각나 드림캐쳐를 따로 사서 온 지민이나, 드림캐쳐가 있다고 무서운 꿈을 꾸지 않는 건 아니지 않지만 이걸 사 온 마음이 예뻐 잘 간직하겠다던 태형이는 그 무수한 같음이 만들어낸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언젠가 이 함성 멎을 때 stay hey 내 옆에 함께 있어줘

 영원히 계속 이곳에 stay hey 네 작은 새끼손가락처럼

 일곱 번의 여름과 추운 겨울보다 오래

 수많은 약속과 추억들보다 오래


언젠가 이 함성 멎을 때- 후렴 부분을 무심코 따라 부르다가 울컥 목이 멨다. 그래서 때때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 미래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끔찍이 챙길 소울메이트로 남아 있을 거야, 이런 삶도 즐겁지 않냐며 웃고 있을 거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밝은 멜로디에 속다 금세 다시 목이 멜 테니.


 이제 우리 많이 웃었음 해 괜찮을 거야 오늘의 내가 괜찮으니까

 어제의 너 이젠 다 보여 움트던 장미 속 많은 가시 안아주고 싶어

 미소진 꼬마 마냥 해맑게 웃던 아이 그런 널 보면 자꾸 웃음이 나와


멤버들 모두 데뷔 초와 지금 모두 성격이 조금씩 변하고 스타일도 바뀌어왔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멤버가 태형이다. 김스치면인연이라 불릴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던 태형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가 줄고 행동이 느릿해졌다. '어렸을 땐 사람이 좋아서 막 먼저 다가가는 것도 좋아했는데 느낀 건 저를 김태형 말고 뷔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도 이런 거 땜에 성격이 많이 변해서 이젠 내 사람들만 남았어요.' 어느 팬이 쓴 위버스 글에 단 태형이의 답은 그 변화 계기를 짐작하게 했다.


지금의 태형이가 어린 자신을 만나면 해주고 싶었을 이야기. 해맑게 웃던 얼굴 아래 웅크리고 있던 많은 가시를 어루만지는 손길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의 넌 힘든 시기를 지날 테지만 나중의 나는 괜찮아져, 해맑은 어린 너도 나고 이렇게 성장한 나도 나야, 그런 너로 인해 나중의 내가 돼, We gon' change, 아직은 어린 네게 와 닿지 않은 문장일 테지만 자주 생각하면 좋을 거야 우린 그럴 거거든, 너의 눈을 비춘 빛들을 항상 기억해 그 빛들이 모여 나중의 내가 될 거야, 그러니 조금만 힘내자, 하는.


 불현듯 아이로 변한 날 봐 볼수록 귀여워 미치도록

 취향도 기준도 뛰어넘어 넌 오직 나만을 원하게 돼

 Yeah 날 만든 사람 바로 너니까


너무나 지민스러운(!) 가사 덕에 혹시 작사에 지민이 참여했나 싶어 가사집을 더듬어 볼 정도인 노래. 그렇지. 지민이는 필터다. 그것도 제한 없는 무궁무진한 색이 담긴 필터. 이렇게 보면 무지개가 되고 저렇게 보면 불투명해지고 다시 이렇게 보면 샛노랗다가 다시 저렇게 보면 짙은 푸른색이 가득하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 


잦은 염색으로 머리가 상해 머리를 댕강 잘라 짧은 머리로 작년 매직샵 무대에 섰던 지민이를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10대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분명 얼마 전까지 <Serendipity>의 해사한 공연을 마친 지민이와 동일인임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채 자라지 않은 채 떠난 뉴질랜드에서 찍어 온 <본 보야지 4>에선 뉴질랜드의 강한 햇살에 거뭇하게 탄 채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지민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알라딘의 지니처럼 언제든 네가 원하는 새로운 모습을 하겠다는 지민이의 나른한 목소리. 오늘의 지민이가 선사하는 필터는 어떤 색도, 어떤 모습도 아닌 그저 박지민 그 자체다. 지민이가 또 지민했다.


  늘 생각해 아직 꿈속인 건 아닐까 길었던 겨울 끝에 온 게 진짜 봄일까

  모두 비웃던 한땐 부끄럽던 이름, 이건 쇠로 된 증명 “Bullet-proof”.

  Yeah we are not seven, with you


남준이가 말했던 커리어에 대한 긍정, 커리어에 대한 사랑이 함축적으로 녹아 있는 이 말. 한땐 부끄러웠던 방탄이란 이름을 이젠 쇠로 된 증명으로 여긴다. 이런 현재가 진짜 봄인지, 꿈 속인가 싶지만 눈을 뜨면 네가 있다. 우리 일곱이긴 하나 우리만 있지 않다. 우리와 함께 있는 네가 있음을 안다. 연습생 시절에 만들었던 노래(We are Bulletproof pt.1), 두 번째 파트란 이름을 덧붙여 부른 데뷔 앨범 활동곡(We are Bulletproof pt.2), 그리고 영원이란 이름을 붙인 그 마지막 선언(We are Bulletproof : the Eternal). 


We are Bulletproof. 우린 방탄소년단이다.  


  모두들 내가 아름답다 하지만 내 바다는 온통 까만 걸

  꽃들이 피고 하늘이 새파란 별 정말 아름다운 건 너야


  난 이름조차 없었어 내가 널 만나기 전까진

  넌 내게 사랑을 줬고 이제는 내 이유가 됐어


  어떤 말보다 고맙단 말보다 난 너의 곁에 있을게

  캄캄한 밤에 훨씬 더 환하게 너의 곁을 지킬게

  문득 생각해 너는 널 정말 알고 있을까

  네 존재가 얼마나 예쁜지 너 알고 있을까


달이 지구를 향해 말한다. 지구 너 참 아름답다고. 석진이 팬들을 향해 말한다. 네 존재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냐고. 달과 지구로 비유된 노랫말은 "달과 지구는 언제부터 이렇게 함께였던 건지"로 시작되는 첫 소절부터 "All for you"라는 끝 소절까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팬들의 존재를 진심으로 긍정하는 석진이의 노래에 진심으로 내 존재가 정말 아름다운 것만 같다. 'Love myself'는 나를 긍정해주는 너와 내가 함께 만드는 과정이다. 너는 나를 충분히 긍정했으니 이제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일이 남았다. 그게 확실히 가능할 것 같다.


정신 차려보니 카페 밖 도로에 어둠이 살짝 내려앉았다. 누가 보건 상관하지 않고 말다툼을 나누던 연인도 사라졌고, 그 자리를 누구를 위해 골랐음이 분명한 프리지아 한 다발을 든 어린 남자가 지나갔다. 리필한 아메리카노가 차갑게 식었다. 트레이를 반납하고 책을 챙겼다. 아직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은 채였다.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탔다. Respect이 뭔데 몰라서 묻는 거야 임마 하는 윤기의 외침이 이어졌다. 제 발로 들어온 아름다운 감옥에서 어떤 파도가 덮쳐도 끝없이 우릴 향해 노래할 거라는 방탄소년단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나는 모른다. 차에 연결된 블루투스로 노래가 끊기지 않게 연결된 걸 확인한 뒤 시동을 걸었다. 


서울에서 진행될 콘서트는 기약이 없어졌고, 공개 방송은 무관중으로 진행되고 있고, 앨범 발매 기념행사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윤기 생일 전 날 대구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슈퍼콘서트도 취소되었다. 아미의 어깨가 우주까지 올라갈 만큼 제대로 준비했다는 앨범 활동을 화면으로만 보고 있다. 덕분에 더 열심히 노래를 듣고, 더 열심히 가사에 집중한다. 나만의 해석이 곳곳에 스민다. 여러 이유로 기억하게 될,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P.S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기자간담회 역시 빈 좌석을 마주한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됐다. 동시통역사가 함께 해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기자간담회. 드디어 마지막 질문 차례가 됐다. 이번 앨범을 준비하며 7년을 되돌아본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 시간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바는 무엇인지, 앞으로 7명이 어떤 7년을 채워나가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멤버들의 답변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남준이 마이크를 잡았다.


"<Black Swan>을 쓰면서 영화도 다시 보고 <Louder than bombs>이나 <Eternal>과 같은 다운템포 곡들을 쓰면서 많이 울었었다. 예전 생각도 나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는 게, 우리는, 나는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다. 7년을 돌아보면서 멋모를 때도 있었고, 실수한 적도 있었고, 잘했다 싶은 것도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잘했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여기서 음악을 하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또 기자님과 간담회를 보는 수많은 아미를 마주 보는 행운도. 그 덕분에 두 발을 땅에 붙일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대단하지 않고,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큰 행운이 왔다는 걸 감사하고 노력해야겠다. 우리 서로 너무 오래 봐서 익숙하고 질리기도 하지만, 같이 얼굴 보면서 건강하고 오래오래, 하루하루 잘 느껴가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고독에 대해, 당신에 대해 내가 다 알지 못하더라도, 혹은 조금 안다 해도 '알은체'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권력. 절대 권력이지.  -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산문집 중 일부


카페에 챙겨가 읽은 책에서 이 문장을 마주했었다. 노래 들으며 역시 남준이다워, 윤기다워 하던 찰나라 강펀치를 맞은 것처럼 멈칫해 가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이었다. 또 팬이라는 이유로 알은체 했구나. 내가 멤버들의 인생을 고독을 얼마나 다 안다고. 이 기분을 잊지 않으려고 이 문장이 포함된 단락 전체를 기록해두었다.


그러나 방금 남준이의 인터뷰로 그때가 잊혔다. 그래도 많이 많이 들여다보고, 많이 많이 좋아하고, 많이 많이 생각하게 되면 알게 되는 수밖에 없다고. 알아져 버린다고. 그때그때를 라이브 방송하듯이 기분을 그대로 중계하는 멤버들은 아니지만, 딜레이 된 방송처럼 언젠가는 그랬노라 말해주는 멤버들은 내가 기꺼이 알게끔 열어주는 '당신'이라고. 어느 게 더 힘을 가지고 있는지, 권력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도 있는 거라고. 


간담회가 종료되고 사회자에게 허리 굽히며 마지막까지 인사하는 멤버들의 몸짓을 눈에 담았다.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곧 앨범 리뷰란 콘텐츠를 들고 라이브 방송을 찾아와 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남준이를 기다리며 7명의 멤버, 7년의 시간이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는 듯 각각의 서사를 온 트랙에 녹여 준 앨범을 오늘도 또 듣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40. 저는 똥손이 아니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