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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31. 2020

49. 단상들 pt.6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49

 

1. Here's Your Refund Request Confirmation                                                                   



<Map of the soul> 뉴욕, 시카고 총 4회 공연 티켓팅 성공. 그것도 전부 사운드 체크 패키지로. <Map of the soul> 투어 시작인 서울 콘서트 좌석 추첨 당첨. 그것도 그라운드 좌석으로. 이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이루어졌고, 위의 글로 나는 결코 똥손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리고 결과는?


잠잠해질 것 같던 바이러스는 여전히 강력한 전파력으로 일상을 파괴하고 있다. 몇 달 만에 문을 연 학교는 확진자 발생으로 하루 만에 다시 문을 걸어 잠 갔고, 겨우 사무실 문을 연 회사들은 고열자 발생으로 다시 재택근무를 선택했다. 평소로 돌아가 봄직하다 싶을 때마다 나타나는 바이러스는 거짓말처럼 일상을 헤집는다. 어느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영화처럼. 모두가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무표정한 채 말하지 않으며, 닿지 않으려 멀어진다. 불특정 다수가 군집하는 콘서트? 그것도 몇 만 명이 운집하는 방탄소년단 스타디움 콘서트? 언제 열릴지 기약조차 없어졌다.


티켓이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 맞다. 나는 진짜 똥손이다.


4월에 개최 예정이었던 서울 콘서트는 진작 취소가 결정이 돼 티켓값이 모두 환불됐다. 그러나 미국, 캐나다 내 콘서트는 취소가 아닌 '연기'로 수정돼 티켓이 모두 홀드 된 채 있다. 누군가는 보험이며 티켓 중개 시스템 등이 우리와 달라 공연 취소를 바로 알릴 경우 엄청난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에 일단은 연기로 수정해놓고 상황을 관망해보려는 것 같다 했다. 좌석만 그대로 유지된다면 공연이 언제가 되든 시간을 꼭 낼 테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꽤 많은 돈이 티켓으로 묶여 있음에도 그랬다. 이렇게 바이러스가 오래, 깊이, 강력하게 창궐할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때엔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항공사의 파산 소식이 들려오고, 여행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타국에서 건너오는 이방인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기간은 무한정 늘어나고, 자국민의 출국 또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됐다. 국내의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 역시 지양하고 있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은 끝이 났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와 개인 방역은 이제 예의와 규범이 됐다.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개최된 124년 역사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올해 역사상 처음으로 취소됐다.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와중에 콘서트, 콘서트 하는 것은 사치였다. 누군가는 업을 잃고 누군가는 동력을 잃는 때에.


방탄소년단의 스타디움 콘서트는 전 세계 팬들이 국경을 이동해 모이는 소우주다. 한 번에 최소 4만 명에서 많게는 6만 명이 공연장에 모인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불특정 대다수가 군집하는 현재 방식의 방탄소년단 콘서트는 언제 다시 개시될지 모른다. 개시되더라도 콘서트를 보러 가기 위한 적당한 항공권을 구할 수 있을지, 비자를 받을 수 있을지, 현지 상황도 불투명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감히 예견할 수 없는 시기다.


Your Event Has Been Postponed


그러던 중 티켓마스터에서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내가 예매한 방탄소년단 콘서트는 연기되었고, 티켓 좌석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된 채 유효하지만 그럼에도 환불이 필요할 경우 30일 이내에 신청을 하라는 골자였다. 취소되고 연기된 이벤트가 많아 티켓 마스터가 부도날 수 있다는 소식이 있는 데다 환불 기간도 30일 이내로 못 박는 메일 내용을 보니 티켓을 이대로 홀드 하기엔 위험부담이 많은 듯했다. 무엇보다 만약 콘서트가 열릴 수 있더라도 지금 같은 규모는 불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유지된 좌석이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Request Refund


절대 내 손으로 직접 할 일 없을 거라 믿었던 콘서트 티켓 취소를 벌써 두 번째 진행한다. 환불 부분을 클릭하니 좌석을 다시 한번 체크할 수 있게 돼 있다. 돌출 무대 가까운 좌석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클릭 두어 번에 예매한 좌석이 사라졌다. 똥손의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We've Received Your Refund Request


얼마 지나지 않아 환불 요청이 완료됐다는 메일을 받았다. 텍스를 포함한 전체 예매 금액이 30일 안에 환불될 거라고,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직까지 좋은 좌석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좌석이 어디냐보다 콘서트를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지금. 좌석이 어디든, 공연장이 어디든, 도시가 어디든. 그 무엇이든 간에 공연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분 좋게 다음을 꿈꿀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나 다시 구할 수 없을 자리라 생각하지 않아야지. 똥손의 기적을 다시 한번 이뤄내 무대와 가까운 좌석을 클릭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안 된다면 값을 조금 더 치러 좋은 좌석을 사면 된다. 리셀이 합법인 나라니까. 그때까지 버티는 거다. 버티는 자에게 복이 있고, 방탄소년단 콘서트가 있다.


일상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여행과 공연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상에 믿을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2. Carpe diem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이 있다. 회사에서 듣는 꾸중이, 당일날 파투 되는 약속이, 누군가의 위로가, 그리고 지금 두 눈으로 확인 중인 체중계의 숫자가 그렇다. 배달 음식 시켜 매일 밤 와인을 기울이고도 아직은 괜찮아 괜찮아했더니 그간의 존재감이 제대로 드러난, 괜찮지 않은 숫자가 떡하니 나타났다. 방법을 달리해 다시 재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와인 장터 세일로 와인 셀러 가득 와인을 쟁여두었는데. 우선 이것들부터 멀리 해야 한다. 당장 오늘부터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바로 갈아입었다. 화장을 지우고 나면 모든 의욕이 사라져 그대로 침대에 누울 것을 알아서다. 모자를 쓰고, 마스를 쓰고,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었다. 방탄소년단 노래 중에 운동하며 듣기 좋은 하이 텐션의 노래들만 따로 뽑은 재생목록을 클릭했다. 첫 곡부터 <So What>이 나온다. 바닥에 운동화 앞코를 툭툭 친 뒤 집을 나섰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땀냄새, 적당한 근육 당김과 적당한 가쁜 호흡. 집 근처 천변에서 약 1시간 동안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유산소 운동을 했다. 종아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졌으나 머리는 깨끗하게 맑다. 앞으로 운동을 지속하는 게 중요하겠지만 첫날치곤 느낌이 나쁘지 않다.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온 뒤 혹시나 하고 올라선 체중계의 숫자는 당연하게도 그대로였다.


다이어트를 마음먹게 하는 동력은 도처에 산재해 있으나 이럴 때 제일 각성하게 하는 건 여자보다 더 매끈한 윤기 다리나 내 한 팔에도 쉽게 감길 듯한 얇은 지민이의 허리도 아닌, 고작 몇 년 전의 나다. 오늘도 5년 전 베를린 여행 때 찍은 내 사진을 넘겨 봤다. 그때도 다이어트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땐데 지금 보니 정말 마르고, 어리고, 예뻤다. 이때 입었던 치마는 지금 전혀 맞지 않고, 보정 어플을 사용해 사진을 찍어도 이때처럼 얄쌍하지 않다. 언제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변해버렸나. 민소매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뉴욕 센트럴 파크에 자리 잡아 노래 듣던 내 사진도 몇 번을 넘겨봤다. 카페인을 들이부은 듯 감기지 않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몇 년 전의 사진첩에서 벗어나지 못 한 밤을 보냈다.


<Love yourself>와 <Speak youself> 투어 비하인드를 다룬 다큐멘터리 <브레이크 더 사일런스 Break the Silence>가 위버스를 통해 공개됐다. 시차에 적응할 때쯤이면 도시를 옮기고, 조금 쉴 만하면 또다시 공연이 시작되는 강행군의 투어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열광하는 팬들의 실재를 확인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으랴. 보람은 힘듦에 비례하고, 공연을 호흡할수록 카타르시스는 커진다.


그 정점이었던 런던 웸블리. 그 넓은 공연장을 매진으로 꽉 채 운 팬들은 <Young forever>를 떼창 하며 우리 함께 건너온 사막은 지금을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려주었고, 멤버들은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성대하고 아름답게 마무리된 공연. 다음날, 멤버들은 다시 <달려라 방탄>을 촬영하고 함께 모였다. 대단한 성취에 도취되거나 함몰되지 않은 평온한 얼굴들로.


밥을 나눠 먹고, 석진이의 <이 밤>을 함께 듣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준이 예전의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 이 화양연화가 끝이 나면 어떨 것 같냐던 물음의 인터뷰를. 숟가락을 내려놓은 멤버들은 그런 남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언젠가 인정을 해야 될 때가 분명 오겠지. 내려놓는다는 게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 내려놓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의지에 의해 내려놓아야 될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때를 준비한다는 것보다는 그럴 때가 언젠가 올 것이니 지금 열심히 하는 거야 결과적으로. 그때가 올 테니 지금 대비해야지가 아니라 지금에다가 최선을 다 해서 미련이 없게. 그게 최고의 준비인 것 같아"


'같은 곳을 향해 걸었었는데,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이 돼. 영원을 말하던 우리였는데 가차 없이 서로를 부수대. 같은 꿈을 꿨다 생각했는데 그 꿈은 비로소 꿈이 되었네'란 <Tear>의 가사가 사실은 멤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던 비하인드 이야기도 이 에피소드를 통해 알려졌다. 언젠가 앨범 리뷰를 하던 남준이 Tear란 단어가 티어로 읽으면 눈물, 테어로 읽으면 찢다를 의미한다며 각자에게 이별이 본인은 눈물, 윤기는 찢음, 호석이는 그 모든 순간을 얘기하는 두려움으로 곡을 만들었다던 말이 생각났다.


높은 곳에 이르러 느낀 고통과 어지러움 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그 고통과 어지러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 혹은 체화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여전히 화양연화의 마무리를 고민하는 대화를 들으며 끝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배려이며 팬들 역시 착륙할 준비를 해야 한다던 어느 팬이 쓴 글이 생각났다. 오랜 고민과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실마리를 찾은 듯한 남준의 말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끈 뒤 핸드폰을 내려놨다. 충전 중인 노트북엔 여행 사진을 차곡차곡 저장해 둔 외장하드가 그대로 꽂혀 있는 상태였다. 노트북 화면을 켜니 10년 전쯤, 홍콩 여행을 하며 찍었던 사진이 나타났다. 변화나 비교란 단어를 빼면 그 하루를 온전히 즐기던 그때의 나만 남는다. 언젠가에 비해 '지금 변해버렸어'가 아닌, '그땐 참 좋았어'다. 어리고 마르고 예뻤던 날이 있었다, 내게도. 예쁜 시간을 지내왔다, 나는. 차곡차곡 사진으로 축적된 그때의 하루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맞다. 오늘은 결코 어제가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퇴근 후 1시간의 유산소 운동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다. 중간에 회식이 있던 하루와 약속이 있던 하루를 제외하면 핑계 대지 않고 운동을 했다. 무엇보다 호흡이 가빠지며 느끼는 건강한 산뜻함이 의외로 큰 동력이 되고 있다. 몸무게 변화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해 조금은 줄었다. 이 하루가 또 다른 내일을 가져올 것이다.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 남준이의 말처럼 우선은 지금이다.




3. D-2



여느 때와 똑같은 일요일이었다. 주중에 운동을 하느라 미뤄뒀던 와인 한 잔을 하고 일찍 잠에 든 뒤 회사 출근하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일찍 일어난. 어차피 일찍 눈이 떠지면 다시 눈을 붙이기 어려운 스타일이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커피 한 잔을 내려서 방으로 들어온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똑같이 핸드폰을 열어 트위터와 위버스, 커뮤니티를 순서대로 돌며 새로 업로드된 것들이 없는지 체크하는데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공식 계정에 D-7 이란 메시지가 떠 있었다. 까만 바탕에 회색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은 D-7의 배경이었다. '대체 뭐지?' 각종 계정과 사이트에서 팬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디데이인 다음 주 일요일에 대단한 게 나오려나,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주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주간이구나 했다.


업무도 적당히 진행됐고, 방방콘을 즐길 숙소도 예약했고, 와인장터 세일을 챙겼고, 점심시간 짬 내 맛있는 식당도 잘 찾아다닌 주중의 마무리는 미리부터 잡아 놓은 저녁 약속이었다. 지난달 말, 석진이 사진 전시를 보고 오며 대리 구매를 했던 MD 상품을 전달하면서 그동안 쌓인 덕질 이야기를 마음껏 하기 위해 일찌감치 잡아놓은 약속이었다. 외부 미팅이 빨리 끝나 이르게 퇴근해 집에 도착했다. 이런 날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는 터. 약속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자 싶어 차키는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D-7 알림이 있던 지난 일요일부터 D-6, D-5 카운트 다운되는 동안 날짜 뒤로 흐릿하게 보이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며 윤기임이 드러났다. 작년부터 작업해 온 어거스트 디Agust D 앨범이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볕이 늘어지는 늦은 오후. 약속 장소로 출발하는 데에 조금 여유가 있어 뒹굴거리고 있는데 트위터 반응이 심상치 않다. 아직 디데이는 이틀이 남았는데 애플뮤직에서 트랙 리스트가 공개됐단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누구보다 궁금한 아이러니를 품은 채 들뜬 분위기에 부유하던 중 알림이 울렸다.


Agust D '대취타' MV


방탄소년단의 슈가이자 민윤기의 또 다른 이름. 어거스트 디의 두 번째 믹스테이프 D-2가 2020년 5월 22일 오후 6시에 맞춰 공개됐다.


숨 죽인 채 봤다. 지난 대장금 테마파크 목격담이 바로 이 <대취타> 뮤직비디오 촬영이었구나. 채로 징을 세게 한 번 친 것 같다. D-2가 날짜가 아닌, 어거스트 디 두 번째 믹스테이프 이름이었다니. 세게 꽝 치고 잔 여운이 한참이다. 국악의 매력을 또 한 번 제대로 뽑아냈구나, 했다. 국악기의 쨍하게 현란한 음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좋다는 말 이상의 단어를 모두 다 끌어오고 싶다.


잠깐 멍하니 있었더니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사운드 클라우드에 접속하니 D-2 전곡이 리스트업 돼 있다. 무려 10곡이다. 그중 첫 번째 트랙인 <저 달>을 클릭한 뒤 택시를 불렀다. 단박에 귀를 사로잡는 대중적인 비트에 욕설이 더해진 직설적인 가사가 콕콕 박힌다. '가끔씩 신께 원망해 왜 이런 삶을 살게 한 지 내가 뭐를 하는지 음악은 사랑하는지'.


퇴근 시간에 맞춰 이동하니 길이 꽉 막혔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 내내 어거스트 디 음악을 처음 들을 수 있어서였다. 헤이러를 향한 <어떻게 생각해?>는 그 자체로 사이다였고, 각자의 삶이란 사색을 담은 <사람>은 바로 다시 또 들어야만 했다. 트랙의 마지막인 <어땠을까>에 다다라선 속절없이 눈물이 터졌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봄날>을, 밖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멤버들을 부럽다고 했던 그 말을, 멤버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던 순간이 자연스레 떠올라서다.


내가 이 덕후 일기를 쓰게 된 이유와 비슷한 마음이 거기 있었다. 이야기들이 몸 안에 차 올라 도저히 그냥 갖고 있을 수가 없는 상태, 표현하고 토해내야만 하는 그 정점.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란 토대 위에 덮어진 자기 인식. 말로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결국 이렇게 음악으로 들려주는구나, 결국 들려주는구나 했다. 그간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까 미안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로 우리를 택해준 마음이 고마워서 눈물이 내내 차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화장 지워질까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꽉 막힌 도로 너머를 괜히 응시한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런 날 이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약속이 있어 너무나 다행인 날이었다.


어거스트 디 처음 앨범보다 듣기 더 편해진, 그러나 그럼에도 현재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반문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윤기에 대해 얘기했다. 말을 덧붙이고 덧붙여도 모자랐다. 4년 만에 나온 어거스트 디 두 번째 믹스테이프 발표를 지인과 함께 밥을 먹으며 자축했다. 함께 부딪힌 잔은 축배였다.


그렇게 그 이후 내내 어거스트 디였다. 질리지도 않았다. 남준이랑 석진이가 브이 앱 라이브 중간에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여전히"를 계속 흥얼거리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였다.


윤기 가사엔 힙합이란 장르가 흔히 선택하는 여자 타령이 없다. 오롯한 사유의 결과물이 가득하다. 기득권에 들어선 입장에서(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고깝게 들리진 않을까 고민하고, '너희처럼 평범해지고 싶어, 평범함이 부러워'하며 분에 넘치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으며('나의 평범함이 너의 특별함'이라고 반대로 얘기한다), 적막이 가득한 밤에 술 한 잔을 찾을 수밖에 없는 위치의 무서움을 절감하다가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며 세상살이에 영원한 건 없이 모든 게 다 지나가는 해프닝일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스쳐 지나가면, 상처 받으면 뭐 어떠냐며.


가끔씩 무섭고 막 도망쳐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루를 또 버티게 될 거라 믿으며 안주 하나 집어 먹지 못 할 혼술을 하는 윤기의 밤을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잘하고 있다는 뻔한 말도, 다 지나가리란 속 좋은 말도 없이 그저 옆에서 지켜봐 주고 싶을 뿐이다.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게 보듬어주고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돌 그룹 멤버. 그러나 여전히 상업적 대가 없는 믹스테이프를 만든다. 투어를 떠날 때 제일 먼저 음악 장비를 먼저 챙기고 호텔 방에 돌아와 비트를 만들고 멜로디를 만든다. 음악을 잘 만드는 자부심은 바탕이다. 이 영향을 받아 다른 멤버들까지 믹스테이프 작업에 돌입했다. 이 긍정의 순환.


다시 <저 달>부터 시작이다. 어거스트 디는 내게 또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노래 열 곡을 하사했다.



P.S


D-7에서 D-2로 이어지는 카운트 다운 마케팅은 윤기가 직접 고안했다. 당초 이 믹스테이프를 5월 말에 맞춰 공개하려고 했으나 페스타와 겹칠 것 같아 한 주 앞당겨 발표했다. 정말 팬잘알 민슈가 선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2020년 6월.

다시, 페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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