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 머무르는 찰나

트레차코프 신관에 가다, 그림을 보는 찰나, 감사함 어울리며 살아가기

by cantata

트레차코프 신관에 가다

토요일 아침이다. 딸과 나는 아침부터 각자의 일정대로 움직이고 숙소에 오후 3시 30분까지 돌아오기로 했다, 아이는 토요일 아르바이트가 있다. 한글학교에서 5학년 아이들을 가르친다. 숙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려서 나보다 먼저 숙소를 출발했다. 11시 30분에 미술관을 예약해 두어 딸아이가 시간에 맞게 보내준 택시를 탔다. 러시아의 택시는 우리나라 카카오택시처럼 앱을 이용해 부른다. 목적지까지의 도로 상황 등을 따져 미리 요금이 결제된다. 요금이 결제된 후라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추가 요금이 없다. 우리도 대략의 요금이 책정된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미터기에 찍힌 요금을 결제한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요금 산정 방법인 듯하다.


택시 번호를 확인하고 탔다. 기사님이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트레차코프란 발음이 아니다. 번역기에 트레차코프 미술관 신관을 찍어 보여드렸다. 맞는다고 하시는 것 같더니 출발을 한다. 가는 길이 많이도 밀렸다. 기사님은 골목골목을 달렸다. 내 생각엔 밀리는 도로를 피해 기사님이 길을 알아서 찾는 것 같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싶은데 아저씨는 달리다 말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나더러 내리란다.


‘잉?’ ‘뭐지?’ 길 한편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다. 아저씨는 경찰들을 가리키며 안된다는 손짓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며 쭉쭉 가라고 하는 것 같은 몸짓을 취하신다. 얼떨결에 내려서 보니 빨간 M자가 보이는 것이 지하철역이다. 여기는 어디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암담했다. 우선 기사님이 가리킨 방향을 가려니 길을 건너야 했다. 다행히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번역기에 사진을 찍었더니 걸어서 20분이 나왔다. 헉. 멀다. 딸아이에게 문자로 상황 설명을 하고 현재 위치의 표지판을 찍어 보냈더니 답이 오길 직진으로 10분이란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미술관의 구관과 신관이 방향도 거리도 틀린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향을 알았으니 걷기만 하면 된다. 10분 정도를 걸었으나 미술관처럼 생긴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걷다가 살피고 걷다가 살피기를 하는데 그제야 큰 건물이 보였다.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를 잘 못 찾아 건물에서 헤매고, 입장권 예매해 둔 것을 생각도 못 하고 현장에서 매표하려고 번역기를 돌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딸에게 표를 못 끊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딸은 “표를 왜 끊어?” “표 예매해서 엄마한테 파일로 보내줬잖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한참 실랑이하던 매표원에게 보여주니 4층으로 가란다. 4층에 올라가 QR코드를 보여주었다. 기계를 대고는 손목시계를 보며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들어가라 손짓을 한다. 예약한 시간보다 내가 40분가량 늦어서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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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붉은 말 1918년 페트로그라드(페트로그라드의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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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즈마 페트로프 보드킨 - 좌) 볼가강의 여인들 우)어머니,1913

첫 전시실에서 만난 작가는 쿠즈마 페트로프 보드킨이다. 현대미술 작가들은 잘. 알. 못이다. 첫 작가부터 그러했다. 그림에서 유독 붉은색은 나를 압도했다. <목욕하는 붉은 말>이 전시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이유다. 말을 타고 있는 소년의 몸은 매끄러운 근육질에 유난히 몸이 황색이다. ‘유럽인들은 보통 하얀 피부를 자랑하지 않나?’ 혼자 말을 한다. 그렇지만 흰 피부보다는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한 가지가 또 눈에 띄었다.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성모마리아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성화에 그려진 그림과는 다르게 서민적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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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 좌)마부제 박사 우)검은 사각형

전시실이 끝이 안 보이고 이름을 모르는 작가도 많았다. 꼭 보고 갈 작가로는 카지미르 말레비치였다. <검은 사각형>에 대한 기대가 컸다. 「새로고침 서양미술사 2」의 표지에 그림 또한 말레비치의 그림이었기에 어디에 있으려나 찾는 재미가 있었다. 전시실의 중간 즈음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만났다. 정말 정사각형, 검은 네모가 캔버스 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뭐가 없었다. 이 그림은 무엇인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상상 초월의 가격이 매겨진 그림이 된 것인가? 살아생전 이 그림을 만난다면 남는 장사를 한 사람이 되므로 부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림과 마주하며 어떤 감동에 젖어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이리저리 각도에 따라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 그림을 가까이 멀리 요리조리 살피다 옆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나쁜 예감>이란 제목은 아니었다. 비슷한 느낌의 다른 작품 <쇠스랑을 든 여자>다. 안나 레포르스카야란 작가는 말레비치의 단순화한 인물 그림을 너무 비슷하게 그려 냈다. 알고 보니 말레비치의 제자더라. 그림을 보고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며 작가를 유추할 수도 있다니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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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 좌)붉은 막대가를 든 소녀 우)쇠스랑을 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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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레포르스카야 - 좌)노란색의 여성 피규어 우) 세 인물

마르크 샤갈이나 바실리 칸딘스키처럼 유명 작가들의 다양한 그림들도 만나는 시간이었다. 들어오며 브로슈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매표하며 정신없어 바로 입장을 해 버렸다. 전시실의 구조를 알았더라면 동선의 꼬임 없이 움직였을 테지만 난 전시실 번호를 보고 움직인 터라 동선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까지 가려면 비상시를 대비해 아이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배터리 양이 남아 있어야 했다. 보조배터리까지 다 사용하고도 아직 마지막 전시실은 멀어 보였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3시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돌아갈 시간을 남겨두고 빠른 걸음을 걷다 눈길이 갔던 작품 아르카지 플라스토프의 <봄>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찰나의 순간에 맘속에 담기는 그림. 이런 것이 감상의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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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시골의 창 바실리 칸딘스키 - 크리놀린을 입은 여인들
KakaoTalk_20250616_094856529.jpg 아르카지 플라스토프 - 봄

감사함, 어울리며 살아가기

약속한 시각보다 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으니 발이 아파 왔으나 미사 시간에 맞춰야 해서 바로 택시를 불렀다. 보통은 일요일에 미사가 있으나 이날은 ‘성모의 밤’ 행사가 있는 날이라 토요일 오후 마사였다. 아이는 러시아에 가면서 한인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간 성당 형제자매님들이 잘해주시고 먹는 것에 도움받아 늘 고맙다고 했었다. 딸이 받은 것들을 엄마로서 답례하고 싶었다. 미사 후 티타임이 있다고 하여 다양한 맛의 휘낭시에와 갈레트브루통을 한국에서 구워갔다. 신자님들에게 내어 드리니 한국의 맛에 감탄하셨다. 시중에 휘낭시에도 있고 쿠키도 있지만 내가 먹어보니 한국 디저트의 질감이나 맛을 따라가지 못했다. “맛있어요.” “감사해요.”를 연신 내뱉으신다.


티타임이 마무리되고 딸과 무얼 먹을까 정하려는데 자매님 한 분이 즉석 초대를 하신다. 윤희와 스터디 멤버이고 러시아어 공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셨다. 신랑은 먼저 한국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본인 뿐이라고 괜찮으시면 집에 가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셨다. 고민하다 초면에 실례인 줄 알면서도 수락을 했다. 장 봐 둔 것이 없어 냉장고를 털어 준비해야 하니 이해하라시며. 집은 모스크바 시내 번화가에 있었다. 도착 후 짧은 시간에 부추전부터 청국장에 김치찜까지 제대로 된 한식이 차려졌다. 음식 고수셨다. 앉아만 있다 숟가락을 드는 것도 염치없는데 맛있어서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이런 작은 것들이 세상을 어울려 살아가는 법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들로 내어주고 내가 부족한 것들을 도움받아가며 말이다. 지금은 받기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윤희에게도 늘 말한다. 시간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들이 돌려줄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지 많이 준비하고 기회가 오면 아낌없이 나누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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