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을 닫고, 이 문을 열며

아침 단상

by 김상래

느리게 흐르던 시간, 다시 빠르게 흘러가다

누구 하나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무사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여행 초반엔 시간이 그렇게나 느리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러하듯, 뒤로 갈수록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비록 잠시 집을 떠나 있었을 뿐이지만, 그곳에 있든 이곳에 있든 삶은 언제나 여행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이 만 보쯤은 거뜬히 걷던 날들이,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내 몸을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아침마다 빠짐없이 비타민을 챙겨 먹고, 유산균과 홍삼도 신경 써먹었다. 고양이가 없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콧물이나 비염 증상이 사라졌고, 세상의 다양한 냄새가 다시 살아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먹고 걷고, 마시고 또 걷다가 숙소에 들어와서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새벽같이 맑은 정신으로 눈을 떴다. 또 먹고 걷고, 버스나 지하철, 기차를 타고 새로운 도시를 들렀다가 돌아오면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졌다. 가족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고, 가장 나이가 많고 체력이 부족한 나만 그런 패턴이었다. 그래도 튼튼한 다리 덕분에 물집이 잡힌 발가락으로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족과 함께한 여정의 풍경들

혼자였다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오래 머물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글도 한 편 썼겠지만, 이번 여행은 가족과 함께였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더 많은 곳을 다니며 세상의 다양함을 마주했다. 남편은 해발 4,158미터의 융프라우에 가고 싶어 했다. 셋이 함께 고산병 약을 미리 챙겨 먹고 올라갔다.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숨쉬기 버거운 느낌이 고산병이라는 걸 체험했다.


파리는 20년 전, 내가 살던 때보다 훨씬 깨끗하고 편리해져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옷 대신 자유로움을 휘감고 있었고, 날씨와 상관없이 야외를 좋아했다. 아이는 그토록 원하던 옥스퍼드를 걸었다. 파리의 밝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이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듯하다. 들뜸 없는 런던의 분위기가,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 자신에게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여행은 유학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직항 비행기를 타고, 유레일 패스와 유로스타 1등석도 이용했다. 학생 시절엔 여유가 없어 못했던 식당 식사를 거의 매 끼니 했고, 종종 와인이나 맥주도 곁들였다. 나는 그때 생각이 나서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편은 계산이 빠르고 철저해서 모든 준비를 촘촘히 해두었고, 덕분에 길을 헤매거나 불편했던 기억이 없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순조로웠다. 물론 음식이 예상과 달랐다거나, 지하철 티켓을 사려던 중 서로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지하철에서 사고가 났다며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티켓은 사지도 못하고 문이 닫히는 일도 있었다. 날씨도 예보와 달라 갑작스럽게 비를 맞거나, 생각보다 해가 쨍쨍할 때도 있었다.


여행 이후의 삶도 또 하나의 여행처럼

하지만 그런 예상 밖의 일이 없다면, 모든 게 너무 평온하기만 하다면, 과연 그게 ‘여행’ 일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저곳에서의 여행이 끝났으니, 다시 이곳에서의 여행을 시작해야 할 때다. 아이들 수업을 위한 준비물도 챙겼고, 주변에 나눌 소소한 기념품도 하나씩 담아두었다.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충분히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흠뻑 취해 있다가 왔으니 , 이제는 그 문을 닫고 이곳의 문을 열 차례다. 하나씩, 차근차근. 빠르진 않더라도 내 걸음으로 이곳에서의 삶을 다시 이어가 보자.


아침 단상

파리와 런던의 변화무쌍한 날씨, 그리고 지금 이곳 창밖으로 내리는 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차 때문인지 어제는 하루 종일 자고, 저녁 무렵 일어나 밤을 꼴딱 새웠다. 그 밤 끝에, 이 글을 조용히 꺼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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