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배우니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 소년에게는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반 옆자리에 앉는 짝꿍이다. 처음에 그는 이 사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잊으려 해도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실처럼 그의 머리를 감쌌다. 결국 깊어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 소년이 말했다.
"난 너에게 내 심장이라도 내어 줄 수 있어."
뜬금없이 웬 연애 이야기냐고? 정답이다. 戀愛(연애)라는 글자에는 조금 전의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으니까. 연(戀)은 마음속 실이 끝없이 내려오는 모습을, 애(愛)는 사람이 손에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둘을 합치면 방금 전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연애라는 단어에는 사랑에 대한 고뇌와 과정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사랑을 주재로 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이다. 그 그림이 변하고 변해 '연애'라는 단어가 되었다.
청춘(靑春)이라는 단어도 비슷하다. 푸르게 자라는 풀밭 위에 뜬 빛나는 태양이 바로 '청춘'이다. 만약 이 모습을 길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청춘답다'라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청춘뿐만이 아니다. 모든 한자어는 하나의 그림이자 이야기인 것이다. 법(法)은 신령한 동물인 해치가 죄인을 벌하는 모습을, 수(愁, 근심)는 가을 무렵 고민에 잠긴 마음을 나타냈다.
이제 단어장을 벗어나 세상을 둘러보자. 내 앞에는 '법학통론'이라는 어렵고 딱딱해 보이는 책이 있다. 그러나 한자를 알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해치가 나쁜 도둑을 강에 빠뜨리고(법), 아버지가 그 모습을 가리키며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친다(학). 옳고 그름을 확실히 읽혀 막힌 머리가 뚫린 기분이라(통) 아이들은 즐거이 이야기를 나눈다(론). 이것이 '법학통론'이 품은 그림이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딱딱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저 그림을 감상했을 뿐.
한자의 눈이 있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소설 속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고, 어려운 전문 용어가 영상이 되어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가장 큰 즐거움은 전철을 탔을 때다. 역명 하나하나가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다. 큰 밭과 산이 펼쳐지고 하늘이 빛나며, 금빛으로 빛나는 물가가 그림으로 걸려 있다. '대전', '김포'와 같은 딱딱한 지명이 그토록 아름다운 줄 누가 알았으리랴. 그래서 난 중문을 전공한 것이 새삼 감사하다. 내게 또 하나의 눈을 선물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글자 하나가 그림과 같다고 보면, 사람들은 태어났을 때 자신을 그린 그림 하나를 선물로 받는 셈이다. 그것도 온전히 자신만의 그림을. 어느 날, 난 내 이름을 그려 보기로 결심했다.
한자를 찾아보니 황금과 똑똑함, 그리고 나무가 내 이름에 들어 있었다. 컴퓨터로 각각을 모델링하여 조합하고 렌더링 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오른쪽 사진이다. 펼쳐진 책 위에 있는 빛나는 나무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아왔다.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조용한 나무,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 등... 한 편의 시와 같은 이름도 있었다. 그걸 모르고 살아간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이렇게 그림으로 만들어 집에 걸어 둘 수도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 딱딱한 책을 쉽게 읽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뿐인 나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걸 보는 눈의 이름이 바로 한자다.
이제 다시 책을 펼쳐서 각 단어의 한자를 찾아보자. 조금만 찾아도 좋다.
그리고 다시 책을 보라.
책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