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곳곳에는 자판기가 많다.
2학기 첫날, 나는 음료수부터 뽑아먹을 생각을 했다. 그건 마치 '통과 의례'라고 할 법한 습관인데, 어디든 새로운 곳에 가면 그곳의 음료를 마셔야 갔다고 할 수 있다는,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콜라랑 사이다가 없고 '2%'같은 음료만 한가득이었다. 아,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콜라야! 정신이 좀 드냐? 아까 카페인 먹다 말고 갑자기 쓰러지더니 이제야 일어난겨?'
햇살이 눈부신 오후의 보건실이었다. 침대 위로 잎사귀에 비친 그림자가 하늘거렸다.
'콜라, 어젯밤에 몇 시에 잤어요?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요'
나는 사실대로 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했다. 어제 향신료 실험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그럴 줄 알았다며, 탄산 부족으로 쓰러졌을 거라고 했다. 간단한 검사를 했더니 당류와 카페인 모두 정상이었다면서. 혹시 더 이상하면 공장에 가야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하셨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아, 오늘 성분 쪽지시험 보는 날이었지. 조금 불쾌해 보이는 선생님께 보건실에서 받은 서류를 건네니 조금 누그러지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반 친구 머닛 메이드가 속삭였다.
'자식, 운 좋구나. 오늘 어려운 시험 나왔는데 마침 빠지다니'
나는 멋쩍게 웃음을 짓고는 바로 앉았다. 칠판을 보니 체육 시간이었다. 반 회장이 들어와 말했다.
'오늘은 체육시간이야. 얼른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모이래'
아이들은 불평이 가득이었다. 남자애들도 축구를 할 때나 좋아하지, 오늘처럼 체조를 하는 날은 싫은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여긴 고등학교라 별 수 없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 않는가. 정말로 재미없는 체조가 끝나자 아이들은 구석에 있는 자판기로 달려갔다. 회장이 먼저 음료를 뽑아서 마셨다. 그 자판기에는 콜라 반, 사이다 반이 있었다.
'나, 대학교에 다니는 꿈을 꿨어. 그것도 아주 높은 데'
'정말? 네 실력으로? 너 중간고사 얼마 받았냐?'
사이다가 별 모양 목걸이를 반짝이며 말했다.
냉소적인 회장 사이다는 나를 비웃으며 캔에 담긴 음료를 마셨다. 흑, 사이다, 정말 얄밉다. 하지만 김은 거의 모든 것이 나보다 뛰어났다. 공부, 운동은 물론이고 외모도 학교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긴 곱슬머리에 하얀 셔츠, 초록색 넥타이를 하고 다녔는데 보기만 해도 청량해지는 느낌. 나도 처음에는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유독 나를 만나면 조롱하기 바빠 밉상이었다.
'그래, 넌 사이다나 마셔. 난 달콤한 콜라 마실 거다'
그러면서 얼른 콜라를 뽑아 마셨다. 더 마셔서 탄산을 충분히 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험에서도 1등급을 받을 수 있으니. 우리 반은 인원수가 적어서 단 한 명만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내 경쟁 상대는 당연히 사이다다. 조용히 뚜껑 끈을 묶는 사이다를 부글부글 끓으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3대 3. 이번 시험에서 사이다를 이겨야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이번엔 지지 않을 거다, 사이다.
'마, 사이다가 그렇게 좋나? 난 니들 다 부럽다잉. 아유 탄산 가득한 것들은 참 날래서 좋은겨~'
'좋아하기는 무슨. 쟤 아까 낮에도 나 비웃고 갔다''
조용히 지켜보던 보성 아이스티가 한 마디 했다. 보성 말이 맞다. 이런 시험에서는 탄산이 있는 아이들이 유리하니까. 거기다 본사에서 온 깐깐한 감독관님이다. 오로지 순수 재료만으로 승부하는 건데, 사이다를 꺾을 수 있었던 제로 콜라랑 디카페인 커피는 다 탈락했다. 결국 난 사이다랑 대면하게 되었다. 아, 정말 기분 나쁘다. 색깔도 없는 주제에.
이럴 때는 집에서 하루 푹 자는 게 최고다. 보건 선생도 수면 부족이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얼른 가방을 메고 집에 가려는데 창문 밖으로 운동장을 돌고 있는 사이다가 보였다. 정말 열심히 뛰고 있었다. 적이지만 훌륭하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까나. 회장을 지켜보다 보니 점점 피곤해졌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
'댕'
방과 후 종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7시에 끝나는 자율 동아리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느덧 여름 노을도 거의 다 질 무렵이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자판기도 곧 끊기는데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콜라는 아니었다.
사이다 캔이었다.
헉, 설마. 하지만 이미 사이다는 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걔가 일부러 남기고 간 것일까. 아까 운동 중이었으니 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오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수가 선물을 줄 리 없었다. 일부러 날 골탕 먹이려 멩토스 가루를 넣었을 거다. 이걸 잘 처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보건실이 아니라 병원 신세다.
조심히 캔을 들고 학교 정문으로 내려갔다. 마침 배수구가 보였다. 아까 교실을 떠날 때 인기척이 들렸는데, 기분 탓이 분명했다. 한 방울, 단 한 방울도 내 몸에 닿지 않게 조심히 따라 버렸다. 텅 빈 캔은 조용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 나가려는데 내 발자국 뒤로 땅이 조금씩 젖어 있었다. 비가 올리도 없었는데. 안에는 보글보글 거품도 있었다. 살짝 찍어 맛을 보았더니 달콤했다. 이건 사이다다.
'이런 비겁한 수를 쓰다니. 이건 부정행위야. 한 번만 더 하면 선생님께 알려드릴 테니 두고 봐'
나는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메아리만 텅 빈 학교에 울려 퍼졌다.
다음 날 마주친 사이다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평소처럼 아침 조회도 하고 급수(給水) 지도도 맡았지만 그 청량함이 온데간데없었던 것이다. 사이다의 절친인 웰치스가 준 얼음도 하나도 입에 안 대었고, 선생님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다음 주면 시험인데, 이렇게 기운 없이 지내면 안 돼. 1등급이 안 되면 2등급이라도 받으면 되잖니?'
사이다는 기운 없는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보고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뭐,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사이다가 없으면 내가 자동으로 1등급을 받게 된다. 기분이 좋아져 절로 탄산이 부글거렸다. 이제 이 달콤한 콜라가 사이다를 이길 일만 남았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환타가... 환타가..'
학급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천연 사이다였다. 사이다의 제일 친한 친구이기도 한 천연 사이다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틋히 창백해져 울먹이고 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복도로 뛰어 나갔고 보성이랑 머닛 메이드도 같이 갔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 끄르륵...끄릅'
환타가 온몸에서 거품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멘토스 공격이었다. 누가 환타 급수에 멘토스 여러 알을 넣은 모양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환타는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서! 콜라! 빨리 보건 선생님을 불러와!'
선생님이 외쳤다.
'이거 큰일났다잉~우리 환타 어쪄냐잉'
'보성아, 넌 자판기 다 뒤져서 황타 캔 좀 찾아내! 머닛도 좀 거들고'
내가 말했다. 다행 재빠른 대응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환타는 장장 2주 동안 공장에 있어야 했다. 시험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전교에 공지가 내려가고 경찰도 찾아왔다. 선생님은 수상스러운 사람은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범인은 정말로 교묘했다. 단 하나의 단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난 알고 있었다. 사이다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구석에 앉은 사이다를 한 번 바라보았다. 사이다는 눈물로 범벅이 된, 처음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환타는 성적이 그리 좋은 학생도 아니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사건은 다음 주에도 또 터졌다. 맥콜과 쿨피스 - 밀키스 형제의 도시락에서 멘토스 알이 발견된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이다 일을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노발대발하시며 우리와 함께 교실 CCTV를 돌려 보았다. CCTV에는 내가 잠에 들었던 그날 사이다가 조용히 캔을 놓고 사라지는 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멘토스는 없었다. 괜히 사이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이다는 그 일로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나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것 같다. 멘토스 사건은 '관심을 받고 싶어다'라고 자백한 닥터 페퍼에 의해 끝이 났지만 사이다는 그 뒤로 조롱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준 호의를 무시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서 그런 것일까.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늘 마음이 불편했다. 잠시 본 그 애 책상 서랍엔 시럽 울음으로 젖은 휴지가 가득했다.
마침내 시험 당일이 되었다. 왕복 5km짜리 시립 운동장을 도는 경기로, 다 돌 때까지 청량감과 탄산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전날 얼음과 탄산을 꽉 채우고 왔는데도 긴장되었다. 시선이 느껴져 쳐다보니 사이다였다. 그 애는 출발하기 전부터 한참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출발!'
그간 기운 없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사이다는 신호가 내리자마자 달려 나갔다. 내 앞에는 프랑스산 오랑지나와 일본 라무네 사이다, 그리고 데미소다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 시험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한 학년의 총 성적, 나아가 대학 입학까지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모든 학생들은 이 날을 위해 힘들게 연습해 왔던 것이다. 물론 부정행위도 끊이지 않는다. 자폭행위나 다름 없지만 그래도 낮은 등급을 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크헉!'
선키스트였다. 누가 멘토스 가루를 뿌려두었는데 그걸 밟은 것이다. 선키스트의 발이 부글거리더니 이내 경로를 이탈해 웰치스와 충돌했다. 두 명 모두 뒤쳐졌다. 보성 아이스티는 립톤 아이스티와 신경전을 벌였다. 이 시험에 아이스티는 하나 뿐. 결국 주의를 잘 기울이지 않던 립톤 아이스티가 벽에 충돌하며 터졌다.
'거 통쾌하구마잉'
이제 1/3정도를 돌았다. 거기서 얼음을 채우고 다시 달렸다. 이제 내 앞에는 10명 정도의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라무네 사이다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제일 앞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을 벗어나 급수 탱크로 간 것이다. 그는 몸에서 구슬을 꺼내 급수탑의 다리를 내리쳤다. 물이 쏟아져 내려 운동장을 적셨다. 물빛이 평소보다 희고 묽기는 했지만. 평소에 욕심이 지나친 애였는데 결국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음료 살려!'
죽어가는 데미소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물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멘토스 가루가 마치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가루의 폭풍은 선두 그룹을 순식간에 덥쳤다. 아까 환타가 멘토스 알을 먹고 2주 동안 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그럼 이 사태의 심각성이 짐작이 갈 것이다. 라무네 본인을 비롯해 선두에 있던 10명의 학생들은 순식간에 거품을 뿜으며 쓰러졌다. 다른 학생들은 정신없이 뒤로 돌아갔다.
내 머릿속에는 사이다의 이름이 스쳤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사이다는. 멘토스 가루 구름은 점점 더 빠르게 다가왔다. 내 옆에 보성 아이스티가 다가왔다.
'사이다는? 사이다는 어디있어?'
'아까 얼음 주는 데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이. 괜히 찾지 말고 빨랑 도망가라이.'
과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이다가 있었다. 부회장 천연 사이다가 그녀에게 다가오다가 멘토스 가루에 휘말렸다. 내가 이름을 부르니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설탕 등불이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약해가지고, 1등급은 무슨 '
사이다는 엄청난 속도로 나를 밀쳐서 설탕 등불을 막았다. 하지만 가루 무리가 그녀 코앞까지 왔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사이다를 데리고 출구로 갔다. 이제 우리는 함께 뛰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하도 세게 잡아서 가스가 끓어올랐다.
우리는 두 명 탄산의 몫으로 구름이 덥치기 전에 출구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신문 1면에 오늘 있었던 일이 보도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멘토스 구름을 피하지 못해 큰 부상을 입었다. 부회장 천연 사이다도, 웰치스와 레모네이드도, 그리고 내 절친 머닛 메이드와 선생님조차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대학 입시도, 등급도 사라졌다. 공장에서 온 감독관은 크게 화를 내며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준비해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아무런 비난도, 조롱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무모한 경쟁보다 서로 돕는 게 훨씬 유익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둘도 없는 사이로 캠퍼스를 다니게 되었다.
'덜컹'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자판기에서 2%가 마침내 나온 것이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25분, 여기서 더 늦으면 장 교수님 수업에 들어갈 수 없다. 숨을 몰아쉬며 서관에 올라가 문을 여니 수업이 한창이었다.
'자, 이제 IPA 기호를 마저 배워 봅시다. 이 기호는 상고한어를 재구할 때만 있었던 유성 저지음인데...'
아, 이런 유성 저지음이 무성음되는 꿈이 다 있나. 노트에는 중국어 민방언의 보수적인 특징 2가지를 적도록 되어 있었다. 민방언이라니. 이렇게 첫눈이 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