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오래간만에 눈이 왔다. 오랜만에 가본 대학 캠퍼스는 정말 예뻤다. 나무와 풀, 건물들이 모두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눈이 많이 온 옛 11월에도 이런 모습이었지, 아마. 하늘에서는 조그만 눈송이들이 인사하듯 천천히 떨어졌다. 마치 작은 천사들처럼 말이다.
천사.
정문 앞에 있는 빙수 가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리워하던 그 가게는 아니다. 하지만 빙수를 맛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여기 팥빙수 한 그릇 주세요!'
새하얀 눈송이 같은 팥빙수가 담겨 나왔다. 그래, 옛날에도 이런 걸 내놓는 가게가 있었지. 부드러운 인절미와 팥의 조화, 한 입 떠서 먹으니 추억이 생각나곤 했다. 달콤한 젤리와 얼음 조각 사이로 옛 기억이 씹혔다. 빙수처럼 하얀 눈이 내리던 2004년 겨울이었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난 공강 시간만 되면 학교 근처의 팥빙수 집에 가곤 했다. 지금은 메가커피로 바뀌어 없지만 말이다. 그 가게는 빙수 말고도 갖가지 종류의 음료를 팔았다. 별빛 셰이크, 얼음으로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팥 마을과 과일 젤리 강이 있는 예술작품이나 다름없는 빙수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단연 최고는 주인 할아버지의 '빙수 궁전'이었다.
그 빙수 궁전은 아마 세계 빙수 대회에 나가도 상을 탈 만한 메뉴였다. 곱게 간 얼음으로 벽을 만들고, 젤리로 조각상을 만들고, 꼭대기에는 금박으로 장식한 탑을 두었다. 그릇에 담긴 버튼을 누르면 미리 마련된 장치로 연유가 내려와 빙수를 적셨다. 딱 한 번 누가 그 빙수를 시켜 먹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 대형 마트 사장님의 환갑잔치 무렵이었을 거다. 사장님과 손님들 열 명 정도가 나누어 먹었는데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고였다. 그 빙수는 가게의 마지막 날 내게로 다가왔다.
특이한 건 그 빙수가 유일한 메뉴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빙수는 주인 할아버지께서 직접 손님을 보고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할아버지는 하루에 딱 열 명만 손님을 받았다. 먹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팔아도 매출이 나올까 싶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 가게에 들어간 건 실연을 당했을 때였다. 고등학교부터 사귀던 친구에게서 버려졌다. 이유는 잘 몰랐으니,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는 게 다였다. 정말 소중한 친구였는데, 그 애가 차지하던 몫이 내 마음에서 빠져나갔다. 그랬더니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 빙수로 치면 얼음이 사라진 셈이다. 남은 팥과 젤리로는 내 삶에 아무런 맛도 낼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않고 방에만 있었다. 한강 생각도 났다. 한강 물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래서 무턱대고 한강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거기로 가는 도중에 버스가 펑크가 났는데 공교롭게도 낡은 빙수집 앞이었다. 한자로 氷水라고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데 빙수 가게라니. 대학 근처라 술집이 많았는데 그곳만큼은 꼿꼿이 빙수를 팔았다.
그때는 가게가 리모델링을 하기 전이라 허름한 데다 손님도 없었다. 나는 울음 범벅이 된 얼굴로 가게에 들어가 뭐든 좋으니 아무 빙수나 달라고 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잠시 놀라시더니 이내 메뉴판 대신 차 한잔을 내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처음 만난 이야기며 자질구래한 것까지 질릴 정도로 이야기했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셨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울적할 땐 달콤한 빙수가 최고지'
라며 사라지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인 할아버지 엎드려 울고 있는 나를 깨웠다. 내 앞에 빙수가 놓여 있었다. 아니, 조각이었다. 눈 덮인 산 위에 앉아 하늘을 보는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나처럼 찢어진 편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누구보다도 반짝여 보이는 것이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이었다. 고작 얼음과 시럽으로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에게 추운 겨울이지만, 언젠가 봄은 반드시 올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힘내게. 이 빙수의 소년도 힘을 내고 있지 않은가? 자네도 꼭 그럴 걸세.'
그러더니 눈 덮인 산 꼭대기에서 젤리 분수가 나왔다. 꽃 모양 젤리 덕분에 눈밭은 꽃밭으로 변했다. 나는 한 수저를 삼키고 그만 눈물이 나왔다. 빙수가 예쁘고 맛있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빙수는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위로였다. 얼음같이 차가운 빙수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으니까.
빙수 값은 팔천 원이었다. 하지만 난 지갑에 있는 돈 전부를 두고 나왔다. 빙수가 아니라 위로에 대한 값이었다.
가게를 나서기 전 할아버지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주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이건 내가 자네에게 주는 행복 카메라야. 지금까지 살면서 좋았던 순간들, 그리고 앞으로 행복한 일들을 이 카메라에 담아보게. 그리고 힘들 때마다, 살 의욕이 없어질 때마다 한 번씩 살펴보는 거야. 그럼 자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걸세. 손님에게 주는 작은 사은품이라고 생각하게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에 가져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시키던 대로 거기에 내가 태어났던 날, 생일잔치 사진, 친구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찍은 행복했던 사진을 저장했다. 그 카메라의 위력은 굉장했다. 대학 이중 전공 선발에서 떨어졌을 때, 괜히 서럽고 무시당한 날에도 거기 저장된 사진들을 보며 난 살아갈 수 있었다. 죽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카메라가 날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 사소한 물건이 내 삶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그 가게 사장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시 힘들었던 날이 찾아오면 가게에 들러 빙수를 먹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한결같이 날 따뜻이 반기셨다. 그 덕분에 나중에는 나름 단골손님도 되었다.
시간은 점점 흘렀다. 카메라의 사진도 점점 늘었다. 연인과 찍은 사진이 가족사진이 되고, 첫 아이도 태어났다. 몇 년 뒤 멀리 이사를 가게 되어 그 빙수집에는 다시 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 여러 빙수를 맛보았지만, 어떤 빙수도,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최고급 멜론 빙수조차도 날 채워주지는 못했다. 맛있는 빙수는 많았지만 마음을 담은 빙수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문 구석에 작은 기사가 났다.
'40년 전통 빙수 가게, 결국 폐업하다'
기사에는 오래된 빙수 가게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폐업한다고 적혀 있었다. 손님은 제법 있었지만, 빙수에 드는 가격에 비해 너무 싼 값을 받아서 그렇다고 했다. 또 프랜차이즈 빙수 업체로 손님이 몰려 이제는 월세도 받기 힘들 것이라도 했다. 사진을 보건대 내가 갔던 그 빙수 가게였다.
2024년, 그때부터 20년이 흐른 뒤였다.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지만 난 차에 올랐다. 눈길이라 위험했지만 그걸 따질 정신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날의 빙수와 카메라가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미 한강 물고기 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폐업하기 전 주인분의 얼굴이라도 뵈려고 과일 선물 세트를 사서 그 도시로 향했다.
차를 달려 빙수가게 골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의외의 풍경이 펼쳐졌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고, 자동차도 많았는데 고급차도 상당히 있었다. 저마다 선물을 들고 가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선 사람을 보니 유명 가수 K군이 있었다. 내가 물으니 그가 사연을 들려주었다.
'저도 무명 가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음반을 냈는데 한 달 동안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집세도 낼 수 없는 형편이어서 포기하는 심정으로 거리로 나왔는데, 가게 앞에서 노래하는 절 보고 사장님이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기타가 장식된 빙수를 주셨습니다. 돈도 받지 않으셨고요. 그리고 평소에도 노래를 들어왔다며 꼭 훌륭한 가수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전 감사하다 못해 온 세상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죠. 그날 먹은 빙수는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답니다.'
'혹시 사은품을 받으셨나요?'
'전 사진첩을 받았습니다. 이게 아니었다면, 아마 가수가 되기는커녕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앨범을 펼쳐 보여주었다. 그날 빙수 가게에서 찍은 사진, 음반 100장이 팔린 날 찍은 사진, 그리고 5만 명이 몰린 콘서트 때 사진이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한 번도 그날 주셨던 빙수 맛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늘 보답하고 싶었는데 폐업한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지금은 회사 대표가 된 한 손님은 입사 면접에서 여러 번 떨어진 날 가게에 왔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고아원에서 자라 도시의 시장이 된 손님,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오히려 화목한 가정을 이룬 손님도 있었다. 모두 입을 모아 빙수와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 손에는 선물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들이 옛날에 받았던 것보다 몇 배는 귀하고 고가의 선물들이었다.
손님들이 가게로 전화를 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나이 든 노인이 한 명이 가게 뒤에서 나타났다. 가게 주인 할아버지였다. 손님들이 달려가 악수를 청했고 쓰러져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몰려든 손님들은 할아버지에게 폐업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물론 가게가 힘들고 손님이 줄기는 했습니다만,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가게를 운영하기는 벅찹니다. 이제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보낼 작정이지요. 허름한 가게에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드린 선물, 어떠셨습니까?'
손님들은 앞다투어 그간의 일들을 말했다. 누구보다 기뻐한 건 할아버지였다. 이야기를 다 듣자 할아버지는 눈밭에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를 올렸다. 손님들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조용히 할아버지의 머리로 내릴 뿐이었다. 그건 눈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천사 같았다.
'저희, 그럼 빙수 파티를 여는 건 어떨까요. 오래간만에 모두 모였으니 함께 빙수나 먹고 갑시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손님들은 단번에 찬성했다. 할아버지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해 함께 빙수를 만들었다. 다른 가게 사장님들과 마을 주민들도 초대해 가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가게가 만석이고 바깥까지 간이 의자를 써야 했으니까. 빙수 궁전은 그날 다시 나왔다. 커다란 나무가 장식된 빙수였다.
'사장님을 위해 건배합시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모르니까요. 옛날에 해 주신 빙수,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찬성이오!'
손님들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뒤로 사진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활짝 웃는 아이와 젊은 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사실 저에게는 손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큰 병을 앓던 손주였는데, 늘 빙수를 먹고 싶어 했지만 형편이 안 되어 먹이지 못했죠. 그러다 처음으로 빙수 가게를 세우게 되어 손주에게 직접 빙수 한 그릇을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몸도 불편했지만 기어이 일어나서 빙수를 먹었는데, 그 행복한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도 할아버지의 빙수를 꼭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떠나고 말았지요. 하지만 손에는 빙수 숟가락을 들고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손님들에게도 그런 미소를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할아비 된 도리이자 주인장의 의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오늘까지 일한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을 보니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희 빙수 가게를 이용해 주신 여러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함께 먹는 빙수는 비록 추운 겨울이었지만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 빙수에는 마음이 담겨 있었으니까 말이다. 분명 무료라고 했지만 손님들, 그리고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도 돈을 냈다.
'빙수 8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무색하게도 손님이 낸 액수는 그것보다 한 참 많았다. 80만 원, 800만 원, 심지어 1000만 원을 낸 손님도 있었다. 가수로 성공한 K 군이었다. 모두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보답을 했다. 차가운 눈발이 날렸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빙수 한 그릇을 품은 채로 가게를 나섰다.
세상에는 맛있는 빙수가 많다. 하지만 마음이 담긴 빙수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빙수 나왔습니다!'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신상품 멜론 빙수가 나왔다. 팥빙수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빙수다. 한 스푼 떠먹으니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동그란 멜론 조각도 입에서 굴려가며 오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