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뺏어 먹는 라면이 더 맛있다

by 디오게네스

아, 라면.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끓인 라면이나 식당에서 시킨 라면보다 동생이 먹는 라면을 뚜껑에 받아서 호로록 먹는 그 한 젓가락이 진짜 맛있는 라면이라는 것을. 그러다 보면 동생의 자꾸 뺏어먹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해. 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pexels-markus-winkler-1430818-3828943.jpg Source: Pexels

사실 대부분의 음식이 그렇지 않나 싶다. 내가 사 먹는 봉지 젤리보다 친구한테 얻어먹은 젤리 하나가 더 맛있고, 운동 끝나고 종이컵에 따라 마신 음료수나 지인이 마지못해 준 과자 한 조각이 더 맛있다. 분명 그 맛을 기억하면서 통째로 사 먹었을 때는 의외로 맛이 없다니.


어쩌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라면 한 젓가락을 먹었을 때 만족도가 10이라면, 점차 배가 부르고 포만감이 느껴짐에 따라 라면에 대한 만족도는 8, 5로 감소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맛있던 라면도 다 먹었을 즈음에는 이미 만족도가 감소해 그 맛이 덜할 것이다. 젤리, 음료수 모두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동생의 라면을 뺏어 먹는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필자에게 허락된 라면은 딱 한 젓가락이다. 이 한 젓가락으로는 효용의 감소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한 젓가락은 그야말로 10의 만족도를 줄 뿐만 아니라 동생의 라면을 먹는다는 심리적인 만족감, 추운 야외라는 분위기, 그리고 언제 동생이 화를 낼지 모르는 긴장감이 그 맛을 극대화한다. 결과적으로 동생에게 뺏어 먹은 한 젓가락은 천상의 맛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음식이 맛있어지는 순간은 더 있다. 바로 한강라면이나 겨울 등산, 혹은 캠핑에서 끓여 먹는 라면이다. 무언가 맛있게 생긴 알루미늄 용기에 계란 톡 까고 치즈에 꼬들꼬들한 면, 소시지까지 사서 넣으면 세상에 부러운 게 없다. 거기다 적당하게 추운 한강의 바람이 라면의 맛을 극대화한다. 라면 한 젓가락에 경치 한 젓가락, 와, 세상에나.


상상해 보라. 당신은 한 겨울에 지리산을 등반하고 있다. 이어진 고된 등반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정상에 도착했는데, 별다른 음식은 없고 다만 당신 가방에 컵라면 하나가 들어있는 상황이다. 매점에 딸린 온수기에서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린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부는데 눈앞의 라면은 김이 모락모락. 계란 푼 국물이라 맛이 끝내준다.

klj.jpg Source: 미래경제

농촌에서 일 돕기를 마치고 먹는 비빔면도 있다. 날씨도 더운데 일손을 돕느라 수고한 당신을 위해 농부 할아버지께서 특별한 별미를 준비했다. 바로 얼음 몇 조각과 삼겹살이 올라간 매콤한 비빔면이다. 윤기 나는 면 위에는 고소한 참깨와 싱싱한 오이, 그리고 면이 부족해 배가 출출하지 않도록 바삭하게 구운 고기까지 올라가 있는 장면이다. 비빔면 옆에는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 상상은 독자 여러분들께 맡기겠다.


라면 하면 짜장라면을 빼놓을 수 없지. 대학생 시절로 돌아갔다고 생각해 보라. 밤늦게 동아리 공연 연습을 하고 동기 몇 명과 피로도 풀 겸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메뉴는 각양각색이다. 계란말이나 파전, 치킨, 모둠튀김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짜계치'가 당기지 않는가? 소주 두 병을 시키고 가게의 '베스트 메뉴'라는 짜계치를 주문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적당히 검고 걸쭉한 짜장 소스 위에 오이와 계란, 치즈가 정갈하게 올라와 있다. 먹어보니 짜장면 하고는 다른 꼬들꼬들한 매력이 있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라면에 치즈가 고소함을 더하고, 잘 익은 프라이까지 먹으니 소주 한 병이 금세 비워졌다. 심지어 가격까지 착하니 세상에 이런 음식이 어디에 있을까.


오늘은 아버지가 요리사. 아버지는 '라면은 예술이다'라고 크게 외치시고는 요리를 시작하셨다. 평소 과장이 심한 아버지지만 오늘은 빈말이 아니다. 국내산 소고기와 버섯, 만두와 떡, 그리고 어묵과 각종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간 호화로운 라면이 완성되었다. 라면 위에 소고기를 정갈하게 얹어 떡과 함께 먹는다. 한강 라면이 발랄한 버스킹이라면, 이 호화 라면은 클래식 음악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면이 음표가 되어 고급스러운 하모니를 연주한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오늘 저녁은 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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