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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캔버슬릭 Jun 06. 2024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세상속에 갇혀있는거에요.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생각

  처음에는 지식을 목적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분명 많은 정보가 쌓이고 노하우가 늘어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가끔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분들의 가치관과 논리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그간 한번도 머리속에서 고민하거나 의심해본적 없었던 주제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깊고 명확하게 사고하고 판단하며 결론을 내려둡니다. 그 단어와 문장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어서 저를 신나게 만드는 것이죠. 그 사람의 사상과 철학적 지식을 배우고 싶은 욕망에 이끌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공개되어있다면 더할나위없이 기분이 좋습니다. 수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생각을 펴뜨려두었으니 곳곳을 다니면서 수집하여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요.지식인들의 즐거우면서도 날카로운 생각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더 많은 지혜와 정교한 가치관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궁금증을 위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독서가 어느샌가 지식이 아닌 사람들이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죠. 작가 개개인의 생각이 궁금해지면서 책의 장르와 종교의 격벽없이 오로지 작가가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만을 바탕으로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독서로 변해왔죠. 노력이야 당연히 다양한 작가들의 책을 읽어보고 이해하려하지만 책 몇 권만으로 그들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죠. 한 사람의 생각만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게 아니라서 조금씩 얕게 쌓아 올리는 느낌입니다. 한명의 작가만의 생각에 집중하고 싶지만 더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병렬적으로 순차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 작가의 한두권의 책을 읽고 느끼는 생각과 지식들을 그대로 보관한 채로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봅니다. 서로 상충되기도 할테고 전혀 상관없기도 할테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알고 싶은 작가들로만 책을 구성하려하죠. 그렇게 돌다가 다시 예전에 만난 작가의 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한번 관심을 가진 작가의 이름이나 책제목이 서점에서 눈에 띈다면 관신을 다시 가지고 고르기도 할테고 TV를 보다가 그 이름이 거론되면 다시 그 사람의 책을 찾아보기도 할테고 말이죠. 가끔 누군가 어떤 작가의 책이나 사상을 이야기한다면 또 궁금해서 찾아보고 있을겁니다.


  흔히 유명한 철학자들을 나열하면 보통 15명 내외로 압축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사상을 하나둘씩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냥은 절대 안된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한줄로 요약할 수 없는 엄청난 사상이지만 그래도 보통 이해하기 쉽게 입문서에서 한두줄로 나타내는 정도로 시작하기는 합니다. 대략적으로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만이라도 알면 적어도 뭐하나라도 조금은 연관시켜서 이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죠. 철학자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의 책을 읽어보면 정말이지 이건 번역이 문제인지 나의 독해력이 문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읽어나가기가 힘이 듭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제가 감히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훌륭한 책이죠. 단락은 둘째치고 문장의 화려함이 뛰어나서 저로써는 쉽게 이해가 않됩니다. ‘철학적 탐구’라는 책은 더 놀랍습니다. 글을 써나가는 방식은 경이롭고 창조적이면서도 작가가 꼭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였을까 하는 궁금함이 드는 책이죠. 책이 얇다고 어리석게 도전했다는게 부끄러울 정도로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소장용 카테고리로 옮겨두었습니다. 아마 먼훗날에도 그 책은 도전과 실패가 항상 같을거같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아주 깊고 날카로워서 1차적으로는 해석이 안되고 4차까지 내려가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조금 이해되는 정도였으니까요. 어렵고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책은 이해하고 받어들이기 어려워서 여러번의 덧칠을 해야만 합니다. 입문서를 여러권 읽고나서 실마리가 잡히면 다른 책도 잃어봅니다. 그 과정에서 사이사이에 또 다른 다양한 책들이 끼어들어가서 읽혀지게 되고 계속해서 만족하는 수준까지 잊지 않고 정진합니다. 철학은 당연한듯이 어렵지만 그것만큼이나 과학이나 예술 또한 그 작가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최근 ‘수학유전자’라는 책을 중고로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최종이론의 꿈’을 추천받아서 읽고나서 이상하고 엉뚱하게도 과학이 아닌 수학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찾아보던 중에 좋은 책인듯 하여 구매하였죠. 과학은 수학 위에 완성되어간다는 말 때문에 그랬던거 같네요. 이번 책을 읽고나면 작가분의 책을 찾아보기도 하겠지만 혹시 구하기 어렵거나 출간된 책이 없다면 다른 작가의 비슷한 책을 또 찾아보겠죠. 이 모든 것이 앞의 철학과 같은 맥락으로 수학 철학이라는 하나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작가를 찾으며 또 하나씩 조금씩 쌓아가는거죠.


  개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할 겁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합리적인 결정 기준은  다양한 환경에서 각기 개별적인 일들을 받아들이고 느껴왔던 삶의 경험에서부터 기인하여 자신의 기준점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과 부탄에서 태어난 사람은 환경이 서로 다르고 문화와 관습이 달라서 그들 서로가 같은 사건을 인지하더라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게 될겁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환경에서 발생하는 차이이며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움인 것이죠. 크게 놓고볼때 문화 또는 관습에 의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며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양육자의 역활과 의미가 얼마나 기여해야하는가의 정도 역시 다를것입니다. 삶에는 각양각색의 생각을 가진 양육자나 주변인들의 가르침이 있고 너무나도 다양한 상황에서 모든 판단에 현명하려는 노력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각자가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발생하는 상황이 달라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예측하기 쉽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도 그들이 처해져있는 환경에는 자연스럽게 차이가 발생합니다.


  개인의 생각은 다릅니다.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양육자별로 스타일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미묘한 차이에 의해서 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죠. 외형이 비슷해보인다고 해도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어렵죠. 사실 나의 생각은 쉽게 만들어진게 아니라 나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결정이기 때문인데 타인인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죠. 내가 만든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절대로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다시 판단해보는 것이 결국엔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바로잡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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