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짜 구해야 하는 것
누군가 당신에게 “하나님을 왜 믿느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참 다양할 겁니다. 현실의 괴로움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고, 소속감과 공동체 안에서의 보살핌을 바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족들이 다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서 믿게 되기도 하고, ‘좀 더 착하게 살고 싶어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좀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좀 더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을 겁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는 결핍이나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사업이 망해 절망 속에 있다가, 병이 나아야 해서, 대학에 붙고 싶어서, 복을 받아 잘 살고 싶어서,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는 일이 많지요. 이처럼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출발점은 대부분 더 잘 살고 싶다는 인간적인 소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을 시작할 때 가지는 다양한 동기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마음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하나님도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지 않으시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것들을 계속 구하는 것이면 충분한 것일까요?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현실의 결핍을 채워달라는 끝없는 요구만을 계속해서 늘어놓으면 되는 것일까요?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신앙에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계명을 주시고, 그렇게 세세한 법과 규례들을 일러주셨는데 어쩌면 그렇게 계속해서 실족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고대인들이라서 현대인인 우리보다 지능이 낮거나 무능했기 때문일까요? 그들의 어리석음을 성경을 통해 배운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실패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관심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원하셨던 것은 ‘진실된 관계’였습니다. 단순한 예배 참석, 율법 준수, 신앙적 외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사랑에 기초한 관계'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무관심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 사랑으로 채워지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약속하신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의 우리는 다를까요? 여러분은 훌륭한 신앙을 가지셨겠지만 모자란 저는 신명기 28장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 리스트, 그 젯밥 리스트를 외우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부자 되게 해 주시고, 전쟁하면 백전백승, 출세하게 해 주시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물론 심지어 내가 기르는 가축의 새끼까지도 잘 되게 해 주신다니, 달달 외워서 기도할 때마다 좔좔좔 외면서 '그 복 내놓으시라'라고 아주 그냥 시위를 할 요량으로 말이죠.
하나님과 우리가 추구했던 방향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자아를 확장하셔서 우리를 품으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을 물질적 부, 사회적 성공,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죠. 우상숭배가 뭐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우상 숭배지요.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신 복을 목적으로 삼았고, 하나님을 수단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송아지를 만들고 돈의 신인 바알을 따르며 욕망을 신격화했던 것이죠.
우리라고 다를까요? 우리의 기도 제목을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한, 우리의 신앙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은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고 합니다.
오 마이 갓.
아직 성공 문턱에도 못 가봤는데, 열심히 믿으면 성공하게 해 주겠다고 해도 반신반의하며 교회에 갈까 말까 할 판국에,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고요?
네.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높아지고, 강해지고, 완전해지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낮아지는 삶, 약함 가운데서 강함을 체험하는 삶,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누리는 삶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이 있으셔서 어떤 사람이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더니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어있었다든지, 자신의 능력의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여 누렸더니 카이스트 교수가 되어 있었더라... 는 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대통령이니, 교수니, 재벌이니.. 그런 게 대수이겠습니까.
제가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함'과는 별개로 '우리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지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
금수저로 태어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감옥을 밥먹듯이 드나들고, 죽을 고비는 몇 번인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패가망신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글쎄요. 번지수를 잘 못 찾으셨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걸 깨닫고는 우울증까지 왔더랬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도대체 무엇을 얻는 것일까요?
자, 우리 자신이 아기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필요한 게 뭘까요?
초유 성분의 우유, 기저귀, 편안하고 따뜻한 잠자리, 부드러운 침구, 아기의 약한 피부를 보호해 줄 면 소재의 옷, 순한 성분의 로션, 모빌, 귀여운 인형, 때가 되면 우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서비스 등일까요?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죠! 그걸로 끝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실제로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주려고 하셨던 게 이겁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축복’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 '그분과의 관계'입니다.
예레미야 24:7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아는 마음’, 곧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아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יָדַע(yada)로,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깊이 경험하며 아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 임재로서 곧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실제이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은 하나님 자체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분과의 진실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신앙을 혼인관계로 자주 비유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신부인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것이지요. 드라마를 많이 본 우리는 결혼의 목적이 '서로'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이 가진 재력이나, 권력, 또는 사회적 배경이 될 때 불행한 결말을 예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압니다.
우리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능력이나 축복을 얻기 위해 그분을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것뿐이죠.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믿음으로 얻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의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떠했었나요?
그 사건에서 당신이 가장 많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단지 감정적인 위로를 받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 존재와 동행을 의미하죠.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원했던 것이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듯이 말입니다. 그 임재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날마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출애굽기 33:1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삶 속에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확실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은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단지 평안만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도 함께 선물로 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이나 쾌락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 곧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1)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기쁨의 근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시편 16:11에서도 다윗은 노래합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이 죽은 후의 천국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깊은 관계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참된 평안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며, 그 사랑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의 욕망에 이끌려 본질을 보지 못하지만,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믿음을 목적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삶이 어느 곳을 향하기를 원하는지 정직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과의 임재와 교제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 나와 맞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목적으로 삶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온전히 받게 하소서.
하나님을 저희의 삶에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제 속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그렇게 우리 삶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