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지 않는다
지난 3월 중순, 와이콤비네이터 데모데이가 샌프란시스코의 와이콤비네이터 오피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약 160개 기업이 데모데이 발표에 나섰으며 언론에 알려진 대로 참여 스타트업의 90%는 AI와 관련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죠.
그중 특히 눈길을 끈 스타트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버전세미컨덕터(Inversion Semiconductor)라는 기업으로, 반도체 전공정에서도 핵심 장비에 해당하는 노광 (Lithography) 장비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곳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속으로 실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반도체 공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리소그래피, 즉 노광 장비가 어떤 분야인지 알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ASML이 글로벌 시장의 90%를 독점하고 있는 공정, 삼성전자와 TSMC가 장비를 한 대라도 더 받기 위해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는 장비로 유명하죠. 심지어 미국은 이 장비의 수출을 제한하는 것만으로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할 수 있다며 심혈을 기울이는, 반도체 미세 공정에서도 핵심 중의 핵심 장비가 바로 노광 장비입니다.
그래서 한 번 인버전세미컨덕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과연 2명의 창업자가 전부인 인버전 팀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ASML이 독점한 시장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겠다는 전략일까요?
인버전세미컨덕터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으로 반도체 리소그래피 시장을 혁신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핵심 기술은 '레이저 웨이크필드 가속(Laser Wakefield Acceleration, LWFA)'으로, 기존의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1,000배 이상 축소시켜 테이블탑 크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재 업계 표준인 ASML의 EUV 리소그래피 장비는 주석 방울을 레이저로 쏘아 13.5nm 파장의 극자외선(EUV) 빛을 생성합니다. 더 정밀한 회로 패턴을 위해선 거울 시스템을 확장해야 하는데, 이는 장비의 복잡성과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반면 인버전세미컨덕터는 컴팩트한 입자가속기를 통해 전자를 극도로 높은 에너지로 가속시켜 동일하거나 더 짧은 파장의 빛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인버전세미컨덕터는 와이콤비네이터 오피스 지하에 미니 레이저 실험실을 설치하고 초기 프로토타입을 개발하였습니다. 특히 데모데이에서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와 버클리 레이저 가속기 연구실(BELLA)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협력은 'Laser Undulator eXperiment(LUX)' 또는 'BELLA-LUX'라고 불리며, 레이저 안정성 향상과 인버전의 프로토타입을 통한 빛 생성 테스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버전세미컨덕터의 궁극적인 목표는 1kW의 소프트 엑스레이 빛(20nm-6nm 파장)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이 기술이 성공하면 동일한 개구수에서 트랜지스터 밀도를 두 배로 늘리고, 스캐너 처리량을 3배 향상시키며, 트랜지스터를 물리적 한계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합니다. 회사는 2028년까지 프로토타입 장비를 개발하여 납품을 시작하고, 2031년까지 상용화 장비를 출시하여 상용화 첫해에 5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는 계획을 제시하였습니다.
인버전세미컨덕터가 내세우는 주장이 유의미한 과학적인 연구에 기반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반도체 분야는 워낙 특화된 분야이기 때문에 '린스타트업'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존재합니다. 학계에서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도전하거나 대형 반도체 기업에서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가 시작하는 것이 반도체 스타트업의 가장 일반적인 경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슴 한 편에는 무언가가 남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허무맹랑해 보이는 스타트업을 수없이 보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런 스타트업들 중에 성공한 곳들이 탄생한다는 오랜 실리콘밸리의 지혜, 타입 2 에러 (실패할 회사에 투자)보다는 타입 1 에러 (성공할 회사에 대한 투자 기회 실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반작용 말입니다.
정확히 10년 전 와이콤비네이터의 W16 데모데이, 그루폰에서 쿠폰 마케팅을 담당하던 임원이었던 블랙 스콜은 새로운 스타트업을 창업해 와이콤비네이터에 참가하였습니다. 당시 아이디어는 전 세계에서 사라진 초음속비행기를 다시 만들겠다는 것. 물론 데모데이에 가져온 것은 작은 모형뿐이었습니다. 이 기업이 바로 붐 슈퍼소닉 (Boom Supersonic)입니다. 얼마 전 모하비 사막에서 첫 시행 비행에 성공하였죠.
같은 배치의 또 다른 창업자 팀 엘리스는 당시 각광받던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 로켓을 찍어내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블루오리진에서 3년 남짓 일한 경력이 전부였던 팀은 데모데이 당시 3D 프린터로 인쇄한 로켓 엔진 모형을 가져와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기업은 2023년 3월 전 세계 최초로 3D 프린터로 제작한 로켓 시험발사에 성공한 렐러티비티스페이스 (Relativity Space)입니다.
두 기업이 과연 성공을 했느냐?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붐슈퍼소닉은 여전히 목표 달성에는 턱없이 모자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렐러티비티 또한 현금 부족에 직면, 얼마 전 구글 CEO를 지낸 에릭슈미트를 CEO로 영입하여 반전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10년 전 누군가는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라고 치부했을 이런 아이디어들이 10년 만에 현실이 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버전세미컨덕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의 실현 가능성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더라도, 그들의 도전 자체를 허무맹랑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혁신의 역사가 우리에게 너무 많은 반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미래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아이디어에 도전하는 창업자를 볼 때면 다시 한번 로저 베니스터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게 됩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몸이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할 수 없게 설계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로저 베니스터는 1956년 대회에서 막판 스퍼트라는 새로운 주법으로 3분 59초에 1마일을 주파하는 대기록을 달성합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이후부터 일어납니다. 로저 베니스터의 기록 이후 한 달 만에 10명, 1년 뒤 37명, 2년 뒤 무려 300명이 같은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1마일 4분의 벽이 실제로는 육체적 한계가 아닌 심리적 장벽에 불과했음을 증명합니다. 이전까지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도전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사람들이 기술은 꾸준히 발전한다고 믿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노력하고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기술은 전승되지 않으며 심지어 퇴보한다는 것입니다. 멀게는 피라미드를 만드는 방법, 병마용갱을 만드는 방법도 더 이상 전승되지 않으며 가깝게는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는 사실조차 여전히 음모론에 휩싸일 정도로 중력을 벗어난 우주 탐사 기술은 5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인버전세미컨덕터, 그래서 이 스타트업이 성공할 확률은? 사실 도전의 가치를 따질 때 확률을 묻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낮더라도 투자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죠. 인버젼은 데모데이 이후 투자자들의 관심이 몰리며 2주 만에 $5Mn 시드라운드를 완료하였습니다. 과연 이 스타트업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한 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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