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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요약이 만들어낸 ‘벤처캐피탈의 종말’ 서사

벤처캐피탈, 종말이 아니라 진화입니다

by CapitalEDGE

라이트스피드의 RIA 전환이 벤처캐피탈 종말?


연휴 기간 동안 링크드인 피드에서 눈에 띄게 회자된 키워드는 ‘벤처캐피탈 모델의 종말’이었습니다. 많은 포스팅이 5월 2일 블룸버그의 기사를 통해 알려진 라이트스피드벤처파트너스(Lightspeed Venture Partners)의 RIA(Registered Investment Adviser) 전환 소식을 인용하며, 전통적 벤처캐피탈 모델이 무너지고 있다는 헤드라인을 사용했습니다. 누적 운용자산이 약 50조 원에 달하는 대형 VC가 SEC에 공식 등록하면서, 마치 VC 업계가 ‘사모펀드화’되고 있다는 식의 서사가 주류를 이루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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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AI 요약 기사와 바이럴만이 중요한 정보 전달 시대의 폐해입니다. 블룸버그의 원문 기사가 최근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RIA 전환, 세컨더리 투자, 공모시장 진입 등 다양한 전략적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을 조명하긴 했지만 AI 요약 기반으로 재구성된 콘텐츠들은 아무런 컨텍스트없이 ‘벤처캐피탈 모델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워딩만 바이럴되고 재공유된 것입니다. AI 시대 컨텐츠 유통의 한 단면입니다.


사실 벤처캐피탈 산업 자체가 2022년 이후 회수 시장의 위축과 성과 둔화, 낮은 수익률로 인해 구조적 약점에 대한 질문에 직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IRR이 뚝 떨어졌고, LP들의 질문은 ‘앞으로 이 자산군이 유의미한 수익률을 낼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라이트스피드의 RIA 전환은 벤처캐피탈의 미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뉴스입니다. 오히려 라이트스피드가 아직까지 RIA가 아니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도대체 RIA가 무엇일까요?


미국의 벤처캐피탈 운용사는 SEC의 규제 체계 내에서 크게 두 가지의 지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ERA(Exempt Reporting Adviser)와 RIA(Registered Investment Adviser)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초기 벤처펀드는 ERA로 시작합니다. 직역하면 ‘보고 면제 자문사’인 ERA는 FINRA를 통해 ADV만 등록하면 2 - 3주 내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보고 의무도 전무하다시피 하죠.


반면 RIA는 SEC에 공식 등록된 투자자문사로, 수탁의무(Fiduciary Duty)를 비롯해 내부통제 구축, 정기보고, 브로슈어 제공 등 훨씬 더 포괄적인 규제를 따릅니다. 이 지위를 얻는 데는 비용과 리스크가 따르지만, 동시에 투자전략에 있어 상당한 자유도를 부여받게 됩니다. 예컨대, 상장주식이나 암호화폐, 세컨더리 지분 등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지죠.


NVCA(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 보고서에 따르면, RIA로 등록된 VC들은 평균적으로 연간 25만 달러의 추가 컴플라이언스 비용이 발생합니다. 규모가 작은 펀드라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규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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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상장 자산을 운용하더라도 총 운용 자산 규모가 $150 million, 즉 약 2천억 원을 넘어서게 되면 RIA로 전환해야 합니다. 규모가 커지면 거기에 비례하여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벤처캐피탈에게만 적용되는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바로 Venture Capital Fund Adviser Exemption이죠. 만약 운용 자산 전체를 벤처캐피탈의 요건에 맞게 운용한다면 자산 규모에 관계없이 ERA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때 벤처캐피탈의 요건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운용 자산의 80% 이상은 기업의 신주 인수처럼 회사에 자금이 유입되는 투자에만 할당하여야 하며 차입은 전체 펀드의 15% 수준으로 제한됩니다.


한국의 모태펀드 출자 조합의 경우 주목적 투자 비중이 60%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비주목적 투자분을 세컨더리는 물론 상장사 투자에까지 일부 사용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내 벤처캐피탈에게 적용되는 기준보다도 매우 엄격한 가이드라인인 점을 알 수 있죠.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10ef277f-e30f-4d5a-95e5-58104ee85b39_1186x852.png 주요 벤처-그로쓰 운용사들의 RIA 등록 시점


그럼에도 수십조 원의 운용 자산을 보유한 벤처캐피탈들이 RIA로 전환한 시점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대규모 크립토 펀드를 운용하는 안데르센호로위츠는 2019년, 오픈AI에 수 조원을 베팅한 쓰라이브캐피탈은 2021년, 최근 8조 원 규모의 신규 펀드를 조성한 파운더스펀드는 2022년 RIA로 전환하였습니다. 라이트스피드는 유사한 규모의 벤처캐피탈 대비 2 - 3년 정도 늦게 RIA로 전환한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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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스벤처스의 RIA 전환


유명 팟캐스트 Acquired에 출연한 알토스벤처스 Ho Nam 파트너의 인터뷰에는 초기 투자에 주력하는 벤처캐피탈에게 RIA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담겨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널리 알려진 알토스벤처스는 2017년 RIA로 전환했습니다. 당시 알토스가 운용하던 펀드 규모는 8,650만 달러로, 실리콘밸리에서도 소규모 VC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전략적인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RIA 전환을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Ho Nam 대표는 당시를 “작은 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준법감시 체계를 만들고, 새로운 회계 시스템을 도입하고, 법률 검토를 수차례 반복하는 과정은 시간과 자금 모두를 소모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제적으로 RIA로 전환한 덕분에 알토스는 로블록스(Roblox)와 우아한형제들에 대한 세컨더리 투자를 대규모로 집행할 수 있었고, 결국 두 기업 모두에서 막대한 수익을 실현했습니다.


특히 로블록스의 경우, 최초 투자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구주를 매입하며 보유 지분을 늘려갔고, 이는 IPO 당시 최대 주주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RIA가 아니었다면 법적으로 이런 거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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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례는 ‘우리가 하고 싶은 투자를 하려면 RIA가 되어야 했다’는 Ho Nam 대표의 말처럼, 전략의 확장을 위해 규제 구조를 먼저 이해하고 대응한 선제적 행동의 결과입니다.


이는 2019년 안데르센호로위츠가 RIA로 전환하며 ‘최고의 투자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무엇이든 투자할 유연성을 갖고자 한다’고 언급한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벤처캐피탈 시장아 커지고 초기 기업 신규 투자만으로 고성장 기업이 직면한 다양한 자금 조달 이슈를 해결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택하는 것이 RIA인 것입니다.



벤처캐피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도화될 뿐

그렇다면 벤처캐피탈의 미래는 정말로 불투명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쉬운 자산군’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벤처캐피탈은 회수가 느리고, 정보 비대칭이 크며, 실패 확률이 높은 자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조 덕분에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시장이기도 합니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대신, 적중했을 때의 수익률이 압도적인 자산군, 이것이 벤처캐피탈의 본질입니다.


더구나 벤처캐피탈은 비상장 단계에 투자하는 형태 중 Type 1 에러(실패한 투자)보다 Type 2 에러(놓친 우량 투자 기회)를 더 경계해야 하는 유일한 자산군입니다. 이는 단순한 통계적 분석이 아닌,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칼라일의 창업자 데이비드 루빈스타인이 아마존의 첫 투자 기회를 놓치고 두번째 어렵게 투자 기회를 얻어 비상장 단계에 투자했지만 IPO 직후 주식을 처분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단순히 투자를 집행하는 문제가 아닌, 기술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벤처캐피탈과 다른 사모펀드 전략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이 '불확실성의 정도'에 있습니다. 2018년 MIT 슬론 스쿨의 연구에 따르면, 시리즈 A 단계에서 회사의 성공 확률을 예측하는 요인 중 팀의 이전 경험과 네트워크가 55%의 설명력을 갖습니다. 반면 바이아웃 펀드의 경우 과거 재무 데이터가 투자 의사결정의 70% 이상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KKR이나 블랙스톤 같은 거대 사모펀드가 아무리 운용 자산이 많아도 2019년 또는 2022년의 오픈AI에 투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투자하도록 설계된 펀드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벤처캐피탈은 무(無)의 단계에서 유(有)를 보는 직관이 투자력의 본질입니다. 팬데믹 당시 KKR과 블랙스톤 모두 ‘성장 단계’ 기술 기업 투자에 적극 뛰어들었지만 성과는 여전히 신통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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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벤처캐피탈은 ‘사람’, ‘네트워크’, 그리고 ‘판단’이라는 비정량적 요소를 다룰 수밖에 없는 자산입니다. 앞으로 벤처캐피탈이 직면할 문제는 수익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뛰어들 수 없게 될 정도로 ‘전문화된 산업’이 되어가는 것이죠.


벤처캐피탈에 대한 회의가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진짜 벤처캐피탈이 되기 위한 장벽은 높아집니다. 때문에 ERA에서 RIA로의 전환은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더 정교하고 유연한 투자 전략을 위한 변화입니다. 라이트스피드의 사례는 종말이 아닌 진화의 이야기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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