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치 첸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시치 첸(Siqi Chen)은 실리콘밸리의 유명 연쇄창업자이자 엔젤투자자입니다. 나사(NASA) 엔지니어를 거쳐 첫 스타트업은 유명 게임 개발사 징가(Zynga)에 매각하였으며, 두 번째 스타트업이었던 Hey는 딜리버리 플랫폼 기업 포스메이츠에 매각했던 인물입니다. 이후 2017년 샌드박스VR을 공동 창업했던 시치는 현재는 핀테크 기업 런웨이(Runway)를 이끌고 있습니다.
지난주 시치 첸이 X(트위터)에 올린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2년 전 그가 투자한 기업이 운영 자금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텀싯을 사인했던 벤처캐피탈이 특별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결정을 번복하며 투자를 철회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해당 기업은 반전을 그리며 최근 폭발적인 매출 성장을 기록, 400억 원 규모의 시리즈 B 라운드를 완료했다는 언급입니다.
'썩은 사과'는 어느 비즈니스 세계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스타트업을 놓고 의사결정을 번복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잠수를 타버리는 일은 지탄을 받기에 마땅합니다.
유사한 피해 사례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 벤처캐피탈이 어느 곳인지 알려달라는 요청에 시치는 방아쇠를 당겨버렸습니다. 해당 VC는 앤토스캐피탈 (Anthos Capital)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시치의 트윗 이후 앤토스캐피탈에 대한 제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2020년 써클업(CircleUp) - 콜라보레이티브펀드(Collaborative Fund) 스캔들 이후 가장 주목받는 VC 고발 사태가 될 전망입니다.
앤토스가 마지막 순간에 투자를 취소하는 경험을 했다는 또 다른 창업자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브릿지 라운드에 동의하지 않아 힘들었다는 소회까지 앤토스에 대한 좋지 않았던 경험담들이 속속 공유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앤토스를 알지는 못하지만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측면에서 텀싯에 서명했다가 마지막에 변심하고, 피투자 기업들에게도 힘든 시간을 주는 것이 단지 예외적인 사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에 있어 마지막까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자금이 납입되기 전까지 절대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 투자 유치의 기본입니다. 심지어 요즘과 같은 혹한기에는 자금이 납입되어도 안심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들리곤 합니다. 하물며 법적 구속력이 없는 텀싯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사모펀드나 M&A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앤토스의 행동이 특별히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해외의 대부분 벤처 투자는 리드투자자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리드투자자가 텀싯을 제안하며 투자 조건을 확정하고 이사회에도 참여합니다. 텀싯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해당 투자사에게 구속력 있는 배타적 협상권을 부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다른 투자사를 물색하지도 못하였으니 리드투자자가 막판에 변심한다는 것은 스타트업의 라운드 전체가 리셋됨을 의미합니다. 남은 현금이 많지 않은 스타트업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창업자 간 벤처캐피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팬데믹 당시 VC Guide란 서비스가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에서도 누구머니, 파운더미츠브이씨 등 유사 서비스가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창업자가 심사역도 평가" VC판 블라인드 등장에 업계 '긴장'
결론은? 잠깐 관심을 받다가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미국의 VC Guide는 현재 서비스를 중단한 상황이며 누구머니, 파운더미츠브이씨 또한 사이트에 최근 정보들이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만난 심사역의 친절도와 첫인상에 대한 평가는 벤처캐피탈이 제공하는 핵심 가치인 '자금', '투자 여부', '가치 제고' 등과 크게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서비스의 본질에 대해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리뷰 사이트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예전 VC Guide의 리뷰들을 보면 재미난 현상이 하나 발견됩니다. 주로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플루언서 투자자들의 평점이 낮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링크드인에서 에너지 넘치게 창업자들을 응원하던 심사역을 직접 만난다면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기대치는 높아집니다. 미팅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평점 테러를 남기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인상 비평이 사람들에게 미팅 전 팁은 될지언정 펀딩을 위해 수많은 투자사를 만나야 하는 창업자에게 게임체인저가 되지는 못합니다. '결국은 투자하는 사람이 우리 편'이라는 격언처럼 VC 리뷰는 참고는 될지언정 스타트업이 정말로 궁금한 '투자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앤토스와 같은 투자자는 어떻게 걸러야 할까요?
실리콘밸리에서는 적어도 리드투자자에 대한 평판 조회는 필수라고 이야기합니다. 텀싯 서명 전 창업자는 투자자의 평판을 알아보기 위해 과거 투자 기업의 창업자들과의 연결을 부탁하기도 하고 본인의 네트워크 등 사적 채널을 동원하여 뒷조사를 해보기도 합니다.
특히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투자자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회사가 잘 되고 있을 때 문제가 되는 투자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핵심은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창업자의 편에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노력일 것입니다.
의외로 미디어에 잘 알려진 투자자들 중에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창업자를 손절하거나 회사를 청산시키기 위해 브릿지 라운드에 협조하지 않는 투자자들의 이야기도 자주 들립니다. 브랜드와 명성만 믿고 투자금을 덜컥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는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도 이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인의 평균 결혼 유지 기간이 8년입니다. 창업자에게는 회사의 이사회에 참여할 리드투자자를 선택하는 일이 결혼보다도 신중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투자는 단순한 자금 유치 이상의 계약입니다. 지금 펀드레이징을 고민 중인 창업자라면 어렵더라도 신뢰할 수 있고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는 투자자를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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