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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pein Jun 06. 2020

해외편) 1-2. 무늬만 주재원

1장. 다시는 주재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은 봄이 어느새 스멀스멀 찾아오고 있었다. 봄은 찾아왔지만 오히려 나는 서울을 떠나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난 정리해야 할 것들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내 생애 처음 산 새 차를 탄 지 3개월 만에 팔게 되었는데 차의 연식이 거의 새 차라도 중고차 판매 가격은 이미 엄청나게 깎여 있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해외로의 이주는 예상치 못한 해지 위약금이 발생했고 이미 사둔 장기 회원권의 금액적 손실도 따라왔다. 중고가 된 자동차 값, 핸드폰과 인터넷 약정 위약금, 1년 치나 끊어 둔 피트니스 이용권, 계약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야 하는 원룸에 대한 처리 등 크고 작은 해지에서 발생하는 금액은 가랑비처럼 내려 어느새 옷을 흠뻑 적셨다. 사람들마다 이런 손실 금액과 항목은 다르지만 어찌 됐건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회사는 이런 비용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난 이런 부분이 상당히 안타까웠다. 회사의 발령으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의 금전적 손실을 부담해주지 않는 것은 회사가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주재원 씩이나 시켜주고 해외까지 보내주는데 이런 자잘한 비용들은 그냥 넘어가도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재원은 개인이 회사로부터 받는 특혜가 아니다. 회사는 마치 이것이 개인에게 내려지는 벼슬처럼 여기며 주재원 대우의 원칙이 있음에도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생략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 원칙을 어기는 것은 위반자의 잘못이지만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은 집행자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내가 각기 다른 두 회사의 소속으로 싱가포르로 두 번이나 파견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주재원들이 출국 준비를 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지원이나 해외 근무에 대한 급여, 복지 조건들을 인사팀에 물어보기 전에 상당히 주저하고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파견자가 알아야 하고 회사의 기준에 맞게 받을 건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특혜’라는 그릇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내 권리와 필요조건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게다가 회사는 개인이 신청해서 받을 수 있는 항목들을 절대 먼저 알려주지 않아 내가 스스로 규정과 기준을 찾아서 요구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어떤 것들은 규정 자체가 아예 없어서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더 최악인 것은 인사팀은 규정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인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규정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인사팀이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가 전부터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해외 파견 규정을 만들고 개정해왔을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규정은 없이 특혜라는 편견만 가득한 조직에서의 주재원 생활은 굉장히 피곤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팀장, 제조 총책 남기사, 케이크/디저트 민 기사, 재무/관리 총책 구대리, 영업/개발 총책 나 이렇게 5명은 어차피 곧 나갈 테스코 포스팀이라 회사에서 임시로 지하에 마련해 준 공간에 모여 출국 준비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회사에서 이사와 거주지에 대한 언급을 우리 5명 중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출국을 할 거고 도착하면 생활할 집이 있어야 하는데 이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준비하라는 말이 전혀 나오질 않고 있었다.


“팀장님, 저희 집은 현지로 넘어가서 구하는 건가요?”


나와 구 대리가 점심을 먹으며 팀장에게 물었다.


“아… 그게, 일단 있어봐. 우리가 아직 정식 팀이 아니고 태스크 포스잖아? 일단 싱가포르로 넘어가고 팀이 되면 집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뭘 그렇게 걱정해? 나도 지금 마누라, 애들 다 남겨두고 혼자 가잖아.”


팀장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에도 집에 대한 얘기가 팀원들로부터 언급될 때마다 팀장은 화제를 돌리거나 얼렁뚱땅 대답하면서 넘기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문제를 의지하고 물어볼 사람은 팀장이 유일했고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다들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팀장님. 저희 이제 출국하려면 진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집을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도 없고 이사는 어떻게 하라는 말도 없고... 이러면 어쩌라는 겁니까? 저는 곧 식 올리고 아내도 와서 같이 살아야 하는데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곧 결혼을 앞둔 구 대리는 집 문제에 점점 예민해졌다. 사실 결혼 유무를 떠나 이 문제는 모두에게 예민한 문제였다.


“나도 답답해 이 사람아. 지금 자네만 그런 거 아니잖아? 나도 지원 부서랑 계속 얘기하고 있어. 그러니까 좀 더 기다려봐.”


팀장 역시 짜증이 났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결국 회사에서 정해주는 주거지 확보에 대한 아무런 지침 없이 떠났는데 회사의 핑계는 우리가 테스크포스이기 때문에 장기 출장의 형태로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해외 출장 숙박비 기준에 맞춰 호텔이든 민박이든 알아서 생활하라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는 우리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하든 건강에 이상이 생기든 전혀 관심이 없었는지 보험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을 하면 회사의 어불성설은 계속됐다. 우리가 1호점을 오픈하고 매출이 발생하면 보험도 현지 보험사를 통해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냥 한 마디로 얘기하면 ‘야, 너네 지금 거기 가봐야 돈도 못 버는데 무슨 요구가 이렇게 많아? 억울하면 너네들이 현지에서 빨리 매장 오픈해서 수익을 발생시켜. 그럼 그 돈으로 집을 구하든 보험을 가입하든 알아서 하면 되잖아?’ 이런 뜻이었다.


난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지금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회사는 교묘하게 태스크 포스라는 명찰을 우리에게 달아놓고 줄곧 팀이 아니라서 주재원 규정을 적용시킬 수 없는 상태라는 핑계를 들이대며 지원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해외 파견자 지원은 내가 받을 일도 없는데 대충 만들자.’라는 안일함이 만든 이기심, ‘어차피 저 사람들은 월급도 나보다 많아질 건데 그거면 만족해야지.’라는 편견이 낳은 질투심, ‘주재원이면 월급도 많이 받는데 당연히 나보다 고생해야지.’라는 질투에서 발전된 적대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 내부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월급쟁이들은 당연히 월급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재원으로 나가는 순간 대리가 국내 팀장 수준의 급여를 받게 되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월급쟁이들 세계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급쟁이도 프로다.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국내에서 뛰는 선배들보다 연봉이 많아졌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원과 스포츠 선수는 분야만 다를 뿐 둘 다 연봉을 받고 일하는 프로들이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라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다그칠 때 비유하라고 있는 말이 아니다. 오늘 당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 내일 당신을 냉정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이니 시기하고 질투할 시간에 위기의식을 가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회사에는 프로답지 않은 인간들이 다수이고 주재원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 상 주재원이 참고 넘어가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이 다수결의 원칙에 밀려 기본적인 주거지 마련에 대한 구체적 합의도 없이 싱가포르로 향했다.


태스크 포스라는 이유로 우리는 정말 장기 출장자로 분류되어 호텔에 살아야 했는데 싱가포르 숙박비 기준이 한화로 10만 원도 채 되지 않아 구할 수 있는 호텔이 거의 없었다. 싱가포르는 대체적으로 고물가이기도 하고 면적이 작은 국가여서 숙박비나 집세가 상당히 높다. 국내에서 현지 물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대충 정해놓은 출장비 기준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마저도 출장 기간이 길어질수록 숙박지는 더 낮아졌는데 출장 기간이 30일이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기준 숙박비의 80%만 지급한다는 식이었다.

난 이때 싱가포르의 저가 호텔이라는 호텔은 거의 다 자본 것 같다. 일정한 거주지가 없기 때문에 호텔을 바꿀 때마다 큰 여행 가방을 끌고 옮겨 다녀야 했고 사진으로만 보고 구한 호텔 방의 크기가 사진과는 달리 실제 고시원 같은 크기이면 여행가방 조차도 놓기 버거울 때도 있었다. 빨래는 호텔 화장실에서 대충 손빨래한 후 에어컨 앞에 널어 말릴 수밖에 없어서 옷을 관리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가진 예산 내에 들어오는 호텔들은 대부분이 고시원만큼 방이 작고 방음이 잘 되지 않으며 위생 관리 상태도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마저도 메뚜기처럼 호텔(호텔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을 전전하다 보니 밥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다. 매일 사 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호텔 주변 식당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환경이었다. 한마디로 의식주가 안정이 되지 않으니 생활 스트레스는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생활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업무 능력이 좋을 수도 없었다. 나 스스로 나를 주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부끄러웠으며 이런 식으로 직원에게 소홀한 이 회사가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사람은 가지기 어려운 것에 대한 요구를 거절당하면 쉽게 수용하지만 당연히 가져야 할 것에 대한 요구를 거절당하면 오히려 더 쉽게 분노한다. 게다가 정해진 사무실도 없어 임시로 임차한 사무실은 5명이 두 줄로 양쪽 벽을 바라보고 다닥다닥 앉아 벽과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런 좁은 사무 공간도 임차료는 결코 싸지 않았다. 국토 면적이 작은 나라에서 공간을 구매하는 것은 그만큼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의 돌아가며 매일같이 팀장에게 애로사항을 얘기했지만 팀장 자신부터가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실적이 있을 때까지 본사에 많은 걸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가 반영될 리가 만무했다.


“자네들 엄청 행운이잖아. 다들 싱가포르 주재원이 되고 싶어서 난리인데 생활 좀 불편하면 어때?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잖아. 우리가 지금 까먹고 있는 회사 돈이 얼만데 이 정도만 해줘도 감지덕지해야지. 안 그래?”


전혀 공감할 수도 동감할 수도 없었다. 난 내가 싱가포르 주재원이 되고 싶어서 난리 친 적도 없고 요즘 세상에 직원을 해외에서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면서 홈리스처럼 지내게 하는 대기업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회사의 돈을 까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해외 사업에 대한 투자를 한 것이고 본인들을 대신해서 나와준 우리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팀장의 개똥 같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린 모두 분노가 치밀었다. 난 부모님의 잘 지내냐, 집은 구했냐는 질문에 거짓말로 대답할 때마다 얼굴을 쥐구멍에 파묻고 싶었다.


호텔 생활에 지친 우리는 결국 룸 렌트를 생각했다. 구 대리는 아파트의 방 한 칸을 구했고 나와 남 기사, 민 기사는 방 3칸짜리 한 집을 빌려 같이 생활했다. 그나마 한 공간에 생활하니 호텔보다는 나았고 빨래와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과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일이었다. 이렇게 내 집도 없는 상황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매장을 구하라고 날 들들 볶았다. ‘당신들이 내 집도 안 구해주는데 당신 같으면 매장이 눈에 들어오겠소?’라는 말이 본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맴돌았지만 어치피 ‘그래도 당신들은 더 받잖아?’라고 생각할 이 아마추어들에게는 그야말로 경 읽기라 참고 또 참았다.

 

내 메뚜기 인생은 호텔을 전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난 브랜드 외판원이었다. 이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인지 당신들 쇼핑몰에 입점시키면 어떤 이득이 발생할지를 계속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다녔다. 그 더운 날씨에도 좀 더 신뢰감을 주기 위해 최대한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었고 한 손에는 언제나 노트북이 들린 채로 매일 쇼핑몰을 찾아다니며 브랜드 소개를 했다.

초기에는 어떻게 누구와 연락을 해야 쇼핑몰 담당자와 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현지 부동산 에이전시를 이용했다. 비교 대상을 위해 복수의 에이전시를 이용했는데 에이전시들을 통해 쇼핑몰 담당자들을 소개받을 수 있는 장점은 있었으나 그들이 실질적으로 내 브랜드에 맞는 자리를 분석해서 찾고 임차료를 열과 성을 다해 협상해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말 그냥 소개만 해 줄 뿐이고 본인이 소개해 준 몰과 계약이 체결되면 매장의 월세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수수료로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많은 후보지들을 막 던진다. 그중에 하나만 걸려도 대박이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굳이 검토하지 않아도 될 곳들을 가게 되기도 하면서 시간적으로 낭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브랜드 론칭 초반에 싱가포르라는 시장과 사람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부동산 에이전시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난 매일 에이전시가 오라는 장소와 시간에 맞춰 가서 쇼핑몰 담당을 만나고 브랜드 소개 자료를 보여주고 매번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난 국내 업계 1위 브랜드이고 어디에서도 매장을 쉽게 볼 수 있는 브랜드라서 외국인들의 관심이 폭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내 착각이었다.


“음… 그래서 뭘 얘기하고 싶은 거죠? 그냥 빵집이잖아요? 빵집이라면 우리 몰에 이미 많아요. 브래드 토크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왜 더 빵집을 열어야 하죠?”


“아, 그게… 저희 브랜드는 종류도 훨씬 많고 인테리어도 엄청 예뻐서 눈에 확 들어와요. 그리고 일단 빵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제가 브래드 토크 빵을 수도 없이 먹어봤는데 실망스러웠죠. 저희 빵 정말 맛있어요.”


“글쎄요. 우리는 브래드 토크 빵 맛에 익숙해서 그 빵이 맛있어요. 그리고 빵집 인테리어가 예쁘다고 크게 효과가 있을까요?”


맞는 얘기였다. 우리 브랜드는 이 정도로만 대충 설명해도 딱 차이점을 느끼고 매력을 알아볼 것이라고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1위라고 글로벌 1위 인 것도 아닌데 바보 같은 자만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난 브랜드 소개 자료를 재 구성하기로 했다. 비록 내 생활은 이 모양 이 꼴이었지만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빵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난 본사에서 받은 너무도 단순하고 오만해 보이는 브랜드 소개 자료를 휴지통에 버리고 몰 담당자들과의 미팅에서 받아온 질문의 답이 모두 들어가 있고 일반 빵집과의 차이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으며 한국에서 얼마나 대단한 브랜드인지 왜 그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의 역사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 자료를 만들었다.

우리 브랜드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 제품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비주얼 위주의 자료였다. 난 사진으로만 봐도 맛있어 보이고 예뻐 보이는 제품들의 하이 퀄리티 사진들을 넣고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재료의 원산지는 어디인지부터 식감과 맛의 표현까지 묘사해 보는 사람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 이미 3천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매장이 있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IMF라는 대규모 실직을 겪은 아버지들에게 가맹점 점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준 브랜드라는 감성적 스토리를 가미했다. 그리고 우리 매장은 빵집이 아니라 와서 쉴 수 있는 카페 공간이며 인테리어와 제품 비주얼이 예쁘기 때문에 여성 고객들이 와서 제품과 매장 사진을 찍어 자신의 온라인 공간에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쭉 이어지는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은 언제나 약 3분짜리 글로벌 홍보 영상으로 이 영상은 정말 초대형 글로벌 브랜드로 보이기 딱 좋게 만들어졌었다. 이 영상은 내가 신입 사원 교육 때 봤었던 기억이 있어 본사에 요청을 해서 CD를 받아 사용했는데 그 효과가 아주 좋았다. 내가 신입일 때나 지금의 싱가포르 사람들이나 둘 다 우리 브랜드를 잘 모르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신입 때 인상적이었던 영상이면 이들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로벌 홍보 영상은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 브랜드가 진출해 있는 국가에서의 매장 풍경과 빵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는데 언어도 영문, 중문이 모두 담겨있어서 아주 유용했다. 아침 8시에 미국에서 모닝커피와 빵을 사고 12시에 중국 베이징에서 차와 디저트를 먹고... 이런 식으로 개점 시간부터 폐점 시간까지 글로벌 시장에 있는 매장과 고객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그냥 빵집이잖아?’라고 했던 그들이 그제야 ‘와우! 맛있겠는데?’라고 바뀌며 브랜드 소개 내내 맛있는 대화를 하며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더욱이 쇼핑몰 담당자들 대부분이 디저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라(그렇게 몰 담당들을 많이 만나고 알고 지냈지만 남자 담당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녀들은 한국 여행을 갈 건데 꼭 가서 먹어보겠다며 여행 코스로 미리 넣어두기도 했다.

사실 외국에서 사업 미팅을 하고 다니는 초반은 엄청나게 많은 긴장을 했다.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은 이런 중요한 미팅을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외국어로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심적부담이어서 연습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미팅이 반복되고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보완해가면서 나만의 노하우가 쌓였고 상대방의 눈빛만 봐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대충 감이 올 정도로 익숙해져 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브랜드 소개에 자신이 있으려면 나 스스로가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회사는 내 자부심을 점점 깎아내리고 있어 일에 신이 나질 않았다. 우린 지금의 상황에서 그나마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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