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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세끼 Aug 21. 2021

너무 늙었다고요

2021년 8월20일

후배들과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 섞이는 듯 하다가도 서로 멀뚱하게 쳐다보게 되는 순간 중 하나가 있다. 

바로 동시대에 즐겼던 문화콘텐츠를 이야기할 때다. 

나름 요즘 젊은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걸 찾아보기도 하지만 

트렌드를 쫓아가기에 역부족이라고 느낄 때가 꽤 있다.

무엇보다 감성의 결이 안맞는 데서 오는, 그래서 공감하기 힘든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중 하나가 작년 넷플릭스를 강타했던  브리저튼.

배우 캐스팅이나 매력적인 서사 등 신박한 요소를 갖췄지만 도저히 여주인공에 몰입이 안되어서 

그냥 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어떤 콘텐츠를 즐기는건 개인의 취향이고, 내가 굳이 그렇게 마니악한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브리저튼의 다프네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다프네를 연기한 배우에게 도저히 집중이 안되는... 

그래서 보는 내내 다프네 자리에 다른 배우들을 이리저리 집어 넣어보는데 열중하느라 작품 자체에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유재하와 윤상의 음악에 빠져있다가 서태지를 만나고 박진영, 김건모 등을 들으며 

X세대의 문화적 축복을 마음껏 누리던 시절 

부모님 세대, 혹은 학번 높은 선배들을 만나면 그분들은 그랬다. 


"요즘 노래가 무슨 노래냐. 말인지 방군지..."(서태지 노래를 들으며)

"저런 건 바로 형사입건이야"(박진영의 비닐 바지를 보며)

"그래도 노래는 나훈아고, 음악하면 조용필이지."

우리들은 쉰내나는 이야기 더 듣고 싶지 않다며 화제를 돌리곤 했었다. 

물론 가왕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이고, 나훈아는 지금 20대의 가슴에도 불을 지르는 카리스마 그 자체라는 건 인정하지만  유재하, 서태지, 박진영 역시 말도 방구도 아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점에서 감성적으로 공감은 잘 안되더라도 지금 누군가가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들은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딸래미가 갖고가지 않은 짐들을 베란다 한구석에 정리하면서 동방신기 팬픽 제본 해놓은 것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웬열... 동방신기. 하긴 이젠 동방신기를 갖고 응8(응답하라 2008)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됐다. 지금 중학생인 2006년생 조카며, BTS에 빠져있는 2009년생 초딩 조카녀석들에게 원더걸스, 소녀시대는 원로가수일테니. 


며칠전 휴대폰으로 영화 <밤쉘>을 보다 엉뚱한 부분에서 빵터졌다.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을 보조하는 인턴 케일라가  방송에 나가는 자료 화면 자막을 쓰면서 실수를 한다. 

록밴드 이글스의 돈 헨리를 글렌 프레이라고 쓴 것. 

그 장면을 마침 지켜보던 방송사 사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다. 

"너 이글스 몰라?"

개박살이 난 케일라는 다음과 같이 징징댄다. 

"저 사람 노래할 때가 우리 엄마가 아장아장 걷던 시절이에요. 똑같이 생겼어요. 너무 늙었다고요."


영화 밤쉘의 한장면. 왼쪽이 케일라 ㅣ네이버 영화


지금 60대 방송사 사장이 젊은 시절 열광하던 톱스타를 20대 인턴이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일터. 

적어도 40대 후반 이상이라면 들국화 산울림 송골매 음악을 한번쯤은 접해봤겠지만 지금 20대에게 멤버들의 얼굴을 아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터. 


갑자기 또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 전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외신에 실비아 크리스텔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실비아 크리스텔 ㅣ위키피디아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출장인지, 행사인지 어떤 현장에서 함께 있던 시간이었다. 20대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여러명이 섞여 있던 자리였는데 나를 비롯해 40대 중후반의 선배들은그를 떠올리며 잠시 아련한 마음을 달랬다. 

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며 너무나 궁금한 표정으로 한 후배가 물었다. 

"누구예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약간 잠긴 목소리로 한 선배가 "엄청 유명했지, 정말 최고였지"라고 말하자 또 다른 선배가 

"에이, 그냥 유명하다는 걸로는 안되지. 우리 젊은 날의 일부였지"라고 안타까워했다. 

후배들은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정리해 줬다. 

"음. 이 선배들, 그리고 70년대 80년대를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던 수많은 소년들이 그를 통해 성인식을 치렀다고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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