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식세끼 Dec 05. 2021

질펀한 19금 로미오와 줄리엣?

지고지순, 애틋하고 풋풋한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대부분은 이렇게들 알고 있다. 너무나 유명해서 읽은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작 제대로 안 읽었거나, 아동·청소년 문학전집 따위의 축약본을 통해 읽은 내용만 기억 속에 갖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 역시 그렇다. 어린 시절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던 내용으로 이후 수십년간을 버티며, 내가 완역본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막상 제대로 보면 줄거리는 비슷할지라도 전체적인 분위기나 색감은 완전히 다른 내용들이 꽤 많다. 차떼고 포떼고 이리저리 쳐내면 서로 다른 두개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읽었던 것이 같은 작품 맞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당황스럽거나, 때로는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들 때도 있다. 내겐 그 대표적인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수백년간 수많은 사랑이야기에 영감을 주었던 이 작품. 완벽한 사랑의 판타지, 아련하고 낭만적인 사랑의 비극. 이런 표현에 더없이 적합한 텍스트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얼마전 꼼꼼하게 대사를 뒤져볼 일이 있어서 이 작품을 완역으로 다시 보게 되면서 무척 놀랐다. 끈적하고 질펀하다는 형용사가 좀 더 어울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면? 19금 비속어 표현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열네살 줄리엣에서 더더욱 현타가 오는. 게다가 로미오가 줄리엣과 사랑에 빠지기 전 다른 여성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사실.



아련한 비극이라기 보다 갑자기 확 깨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데서 살짝 죄책감 같은게 느껴지는 건 또 왜인지. 물론 두 어린 연인이 안타깝고 가슴아픈 사랑의 주인공인 것은 맞는데, 이 작품이 블랙코미디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인 것 같다.



1. 금사빠 로미오?

 로미오에겐 줄리엣보다 먼저 사랑했던 로절라인이라는 여성이 있다. 극 초반부 로미오는 로절라인이라는 여성 때문에 상사병을 앓고 있다. 로미오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로절라인의 ‘철벽’은 바늘도 안 들어갈 수준이다. 사촌 벤볼리오에게 터놓는 로미오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 여인은 큐피드의 화살에 맞기를 거부한다네. 그 여인은 구애의 말로 공격해도 굴복하지 않고, 눈빛으로 공격해도 상대해 주지 않고, 성자마저 유혹하는 황금에도 무릎을 벌려주질 않네.”


 이렇게 사랑에 전전긍긍하던 로미오. 줄리엣 집안인 캐풀렛 가에서 여는 파티에 로절라인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숨어 들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줄리엣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껏 가슴앓이했던 로절라인에 대한 사랑을 깡그리 짓뭉개버린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지금까지 내 마음이 사랑을 했다고? 내 눈이여, 아니라고 부정하라! 오늘 밤 전까지 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으니.”

 이 대목에선 비장하고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라기 보단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미오는 자신의 사랑을 어지간히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듯하다. 그가 멘토로 여기던 신부 로런스를 찾아가 줄리엣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신부는 어이없어 하며 말한다.

 “맙소사, 이 무슨 변덕이란 말이냐. 자네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로절라인을 그렇게 빨리 저버렸다고? 자네가 로절라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로 창백한 뺨을 씻었더란 말이냐. 사내자식이 지조가 없는데 여인네가 타락하는 것을 어찌 탓하리.”

 역시 시트콤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



2. 베로나 이장댁 스피커  유모님

 줄리엣의 유모는 드라마에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코믹 감초 캐릭터다. 실사 캐스팅을 한다고 치면 특정한 배우들이 떠오르는. 아무튼 쉬지 않고 주첵스럽게 떠들어대는데다 말 옮기는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르다. 하는 말들과 비유는 어찌나 노골적이고 낯뜨거운지. 때문에 숙연한 것으로 생각한 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피식거리며 웃게 만들어 준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들이다.  

 “열 두살적 제 처녀막을 두고 맹세코”

 “1년 365일 중 바로 그날, 아가씨가 젖을 뗐다니까요. 전 젖꼭지에 쓰디쓴 약쑥 즙을 발라 놓고 비둘기 집 담 밑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었죠.”

 “아가씨 이마에 병아리 불알만한 혹이 났는데 위험하게 부딪친 상처라 아가씨가 몹시 울었답니다.”

 “아가씨는 제 젖꼭지에서 지혜를 빨아들인 거라고나 할까요.”


3.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

 따지고 보면 머큐쇼도 비극의 주인공이다.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는 로미오 집안과 원수인 캐풀렛가의 사람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비장하고 극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체호프의 작품 갈매기 마지막 부분처럼 황당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극 전반부에 자주 등장한 그는 줄리엣 유모 보다 한 수 위의 저속하고 외설적 농담을 쏟아놓으며 극의 긴장감을 풀어놓는다. “지금 대낮이냐”고 묻는 유모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런 식이다.  “그럼요 저 음탕한 해시계의 손이 지금 정오의 바로 거시기 위에 놓여 있으니 말이오.  

 로미오와 다른 친구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성적 용어와 표현들을 남발하는데, 로미오를 비롯해 친구들은 매번 그에게 무슨 뜻인지 묻는다.  사랑에 빠진 로미오를 향해 그는 “그녀는 쩍 벌어진 서양모과가 되고 자넨 길쭉한 서양배라면 오죽 좋겠는가”라고 말한다. 이런 표현에서 쓰이는 서양모과와 배는 성적인 표현이다. 서양모과는 여성의 엉덩이를, 서양배는 남자의 성기 모양을 닮았다는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또 로미오에게 “네가 꿈의 요정 매브 여왕과 함께 누워 있는 꿈을 꿨다”고 말하는데 로미오를 비롯한 친구들은 매브 여왕이 누군지 모른다. 해설에 따르면 매브여왕은 인간들의 성적 욕망의 매개체라는 설명이 나온다. 머큐쇼는 이런 부분에 관해 지식이 부족한 친구들에게 여성들이 성행위에 능숙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도 매브라고 설명해준다. 그런 머큐쇼에게 로미오는 “허망한 얘기만 늘어놓는다”고 핀잔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시대 음담패설 이라굽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