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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RICORN Feb 11. 2022

잠시 중단하고, 내 안의 소리를 들어볼 시간.

피로사회를 읽고 나서. by 한병철.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피로사회"책은 이 문구를 띄우며 책을 시작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000번 총류에서 책들을 훑어보다가 매우 얇은 "피로사회"라는 직관적인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빌렸다. 그러나 직관적이고 매우 얇았던 책은 오랜만에 나를 당황시켰다. 그동안 읽기 쉬운 책만 골라서 읽다가 크게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랄까.  한 번봐서는 책을 이해하는 것이 퍽 어려웠으나 "반납 기일을 맞추어"야 겠다는 핑계 아래에 책을 한 번 간신히 훑을 수 있었다.


책이 출간된 지 십 년이 조금 넘어서, 많이 오래된 책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시간이 더 촘촘하게 빠르게 지나가는 지금, 이 책이 처음 사람들에게 일깨워 줄 타격 강도는, 지금 접하는 나에게는 조금 약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꽤 많은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되어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이 나온 문장을 나 스스로 꼽자면 아래와 같다. 


 "성과사회의 이념 아래, 사람들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스스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 설명을 하기에 앞서,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독일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었고, 91년 냉전 체계가 무너지면서 과거의 "주적"이 없어지던 시대가 왔다. 지난 과거에 뚜렷하게 우리에겐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에 살아왔다.  즉,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았던 시대에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그 자체이다. 즉,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타자마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성과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성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다. 지배 기구가 소멸됐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다"라고 믿게 됐다. 그리고 본인이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과"를 낸다면 소위,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는, 이 체제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모든 사람들은,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유로운 강제" , "강제된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성과 주체는 누구에게도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외에 누구도 구속되지 않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착취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면서도,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유"당해"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착취자가 되기도, 비 착취자가 되기도 한다. 이 성과주의 체제 내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만 폭력적이기도 한 자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지배계급에 착취당했던 노동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고 착취하면서 우울증을 앓게 된다.  즉,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에서 '분노'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그가 설명하기로는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현대 사회가 과한 긍정을 강조하고, 이런 긍정성이 증가하게 되면 부정적 감정은 자연스럽게 약화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까 설명했듯 어떤 상황을 중단시킬 '분노'가 줄어들게 되면,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 역할을 하는 사유가 컴퓨터와 같이 그저 계산만 하는 것처럼 변질될 것이라고 한다.(이해하기 특히 어려운 부분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父가 아니다 不다.)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은, 단순히 무력함, 능력의 부재와는 다르다. 오히려 무력함은 무엇인가에 대한 종속이며 무지성의 긍정과 궤를 같이한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성은 이러한 어딘가에 종속되어있는 긍정성을 넘어서게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과잉 긍정은,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과 마찬가지며, 거기서는 어떠한 정신성도 생기지 않고 활동 과잉상태에 사람들을 빠지게 만든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그만둔다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 "공"에 도달하려고 한다. 공이라는 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상태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두고, 쉴 수 있는 상태로 갈 수 있는 어떠한 '피로'라는 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상태를 줄 수 있다고 이 책에서는 설명한다.  


이밖에도 상당히 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은 현대사회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동일인이라는 것이고 성과 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라는 점이었다. 책의 내용은 나에게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나에게 도전의식에 불을 지피운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사회에서 원하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수동적인 예스맨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여 나 스스로 나의 삶의 주도권을 찾을 수 있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그저 밖의 세상에서 원하는 모습이 아닌 나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시간, 지금을 그런 시기로 삼아 인간으로서의 사유를 할 수 있는 내면의 근육을 키우자는 것이 나의 이 책에 대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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