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질 것, 그것이 비록 한 줄일지라도.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과정이 귀찮은 일이 종종 있다.
약속을 잡는 것이 귀찮고 나가는 과정이 귀찮지만 막상 만나면 즐겁고 헤어질 때 아쉬운 모습을 보면 아직 사람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 분명하다.
30대가 되고, 코로나에 강제 사회적 거리 두기를 둔 결과 남은 것은 '비슷한 결'을 가졌거나 만나서 '편안한'사람들만이 남았다. 어제도 사람들을 만났다. 글쓰기 모임으로 뭉쳐진 사람들이었는데 오랜만에 봐도 즐거움뿐이었다. 셋은 생김새도 성별도(?) 관심사도 매우 다르다. 그러나 단 하나 공통의 관심사 '글쓰기'만이 우리들의 결속의 끈이었으나 그것도 안 한 지 오래 벌써 5년-6년을 보았다. 그러나 이 친구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들이 참 '건강하다'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아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최소한 '공감'은 할 수는 있어도 '이해'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그러나 이 세명은 서로의 다른 대화를 하면서 '네가 맞다', '네가 틀리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들어줄 뿐이다. 나의 말과 행동이 '평가'받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다. '필터링'의 과정을 별로 거치지 않는 대화는 나를 덜 피곤하게 만든다. 사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필터링'의 천국이다. 요즘 비록 '돌직구'라는 단어들과 '사이다 발언'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그저 미디어에서 보이는 모습일 뿐 나의 모습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해서 대화를 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덜 정제된 필터링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라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웃고 즐기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흘러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사회적으로 포지셔닝을 '솔직함'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솔직함의 프레이밍도 역시 절제된 솔직함이다. 내 나름대로 필터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교수가 나에게 말했다. "000 씨는 참 고민과 걱정이 없어 보여." 그리고 나는 이 발언에서 나의 프레이밍의 필터링의 강도가 이 수업에서, 이 자리에서, 이 사람들에게 MAX로 작용하고 있구나. 최대치의 필터링, 이 자리는 나에게 과연 편안한 자리일까?
항상 편안함을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항상 불편함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그 사이의 적정선을 지키면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함이라는 것이 나라는 사람인가 내가 만든 가면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 요즘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잦은 요즘, 모든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비추어지는 요즘,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군중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에 대한 질문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