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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나를 잘 알고있을까?

김영하의 단하나의 삶을 읽고나서

by CAPRICORN

나는 정말 ‘나’를 잘 알고 있을까?

요즘 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쉼 없이 내 앞을 스쳐 간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질투하기도,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정말 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당황한 적이 많았다.
화를 내면서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너 왜 화내는 거야?’


그렇게 분노에 휩싸이면서도, 정작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이럴 수만은 없다는 마음에, 관련된 유튜브를 보고 관계에 관한 책도 찾아봤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들어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저 ‘나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이렇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없을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왜 이토록 무뎌지지 않는 걸까?
물음표만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조금 더 초연해진다고들 하는데,
왜 나는 중학교 때 하던 고민을 서른이 넘은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걸까.
그 사실에 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특히 작년, 인간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떤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오랫동안 마음의 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냈을 때, 돌아온 반응은
“너는 그동안 별로 사람들한테 안 당해봤구나?” 같은 말뿐이었다.
그 반응에 또 다른 상처를 받았다.
내가 과연 안 당해봤던 사람인가?
나도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도 고민도 겪어온 사람인데,
왠지 모르게 온실 속 화초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니까.

돌아보면, 나는 다른 사람을 내 생각대로 단정 짓는 걸 꺼리는 편이다.
한 사람을 ‘그렇다’라고 규정하면,
그 규정 안에서만 그 사람을 보게 되고, 실망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성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걔는 원래 그래”, “걔 성격이 그렇잖아”라고 말할 때면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을 잠깐 봤을 뿐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
나는 '그'라는 지시어 하나도 조심스럽게 짚고 넘어가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라,
그런 말투는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이 말은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아니 어쩌면 판단하기가 두렵다는 나만의 방어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회사를 이직한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불쑥 “잘 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자신조차 놀랐다.
어째서 남의 성공을 축복하기보다,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긴 걸까?

그 생각이 든 후, 계속해서 고민하게 됐다.
이래서 순자가 ‘성악설’을 말했던 걸까?
그러다 친한 언니와 그 친구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됐고,
내가 털어놓듯 말했다.
“나도 모르게 걔가 잘 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랬더니 언니도 웃으며
“어? 나도.”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우리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나만 못된 사람이 아니구나.

이 복잡한 감정들과 고민은 결국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김영하 작가의 『단 하나의 삶』이라는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복잡했던 지난 1~2년, 그 책 속에서 나는 작가와의 의외의 공통점들을 발견했다.


“우리가 현실 공간에서 애써 눈감고 있는 어떤 진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우리 모두 변한다.”

→ 많이들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변화를 매일 체감하고 있다.
감정은 여전히 다혈질적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 더 많이 포용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게 됐다.
부모님을 보아도 그 변화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변한다”고 믿는다.



“나는 생각을 돌리지 않았고, 동기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나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이유 없는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나를 이해 못하는데, 타인이 나를 이해하긴 얼마나 더 어려울까?




“어쩌면 우리는 모임을 떠난 사람들이 불행하기를 내심 바라는지도 모른다.”
→ 앞서 말한 이직한 친구에게 느낀 내 감정과 겹친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묘한 만족감.
이 감정을 부정하는 대신,
인정하고 반성하는 일이 어쩌면 더 인간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다.”
→ 결국, ‘나’란 존재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 속에서 여러 얼굴을 가진 나는
극E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극I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 괴리는 내가 만든 것이며,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마음이 놓였다.
“기분을 관리하라”는 책은 많지만,
기분이 늘 내 마음처럼 다뤄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단지, 누군가로부터
“그저 너가 유별나지 않아. 너처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고민이 많아.”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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