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은 왜 블랙일까?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by 남국의 기장


항공기 조종실은 두 명의 조종사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하나의 이륙, 하나의 절차, 하나의 착륙이 비행 안전과 직결된다. 그래서 항공계는 오랜 시간 동안 CRM(Crew Resource Management)을 발전시켰고, 그 핵심에는 '우리는 혼자 비행하지 않는다'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진리가 놓여 있다.

하지만 모든 조종사가 이 진리를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은어처럼 ‘블랙’이라는 단어가 있다. 겉으로는 정확한 지시와 확고한 어조로 비행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부기장과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기장, 즉 확신에 가득 차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블랙 기장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고, 부기장을 부하로 취급하며, CRM이 좋다고 오해한다. 부기장들은 결국 언매치 제도를 통해 그와 함께 비행하지 않으려 한다. 안전을 위해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성격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왜 어떤 기장들은 확신에 사로잡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없을까? 그리고 그런 비합리적 확신이 왜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 ‘정상’처럼 느껴질까?


필리프 슈테르처의 '제정신이라는 착각'은 이 질문을 설명하는 데 우리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확신은 흔히 “사실”이 아니라 “감각”이다


슈테르처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실제로는 뇌가 만들어내는 해석의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았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뇌가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구성해 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뇌는 그 내용이 사실성이 떨어질지라도 내 마음에 드는 세계를 만든다.

문제는 이 해석이 때때로 굳어져,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의 감각으로 변해버린다는 데 있다.


블랙 기장은 본인의 오랜 경험, 선배로서의 위치, 반복된 루틴 속에서 형성된 심리적 패턴을 통해

“나는 옳다”,

“난 이런 상황을 수백 번 겪었다”,

“네가 틀렸고, 내가 맞다”는 확신의 감각을 갖는다.


이 확신은 논리적 검증을 거친 결론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안전한 세계관에 갇힌 결과물이다.

그 안에서 그는 진심으로, 정말로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의 말은 부기장에게는 확신에 찬 헛소리이지만, 그에게는 명백한 진실로 울린다.




CRM이 무너지는 이유: 확신은 왜 소통을 파괴하는가


CRM의 핵심은 상호존중, 개방적 소통, 상황 인식 공유다. 그러나 확신에 빠진 기장은 부기장의 말이 자신의 판단을 위협한다고 느끼며, 뇌는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인지적 방어 벽을 높인다.

블랙 기장은 부기장이 제안하는 확인, 질문, 우려를 도움이 아니라 도전, 간섭, 불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은 닫히고, 표정은 굳으며, 조종실 내부 분위기가 긴장된다.


이는 기장 개인의 성격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행 환경은 복잡하고, 인간은 오류를 범하며, 한 사람의 판단은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명이 서로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CRM인데, 확신에 사로잡힌 기장은 그 장치를 스스로 꺼버린다.




비합리성은 ‘질병’이 아니라 ‘기본 설정’이다


슈테르처는 우리가 흔히 ‘비합리적’이라고 부르는 행동조차 뇌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기존 믿음을 유지하려는 경향

권위나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특성

자신의 세계관을 방어하려는 심리

이 모든 것은 진화적으로도 보편적인 인간의 특징이며, 오류가 아니라 기능이다. 따라서 블랙 기장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기보다, 어느 방향으로든 굳어져버린 인지 패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친다. 그들 또한 나름 ‘정상적’이다.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이 경험해 온 방식대로, 그들은 정말로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그들의 비합리성조차 그들에게는 합리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우리는 언매치해야 한다


이해는 필요하다. 그들도 기장의 자리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비행과 훈련을 거쳐왔고, 그 확신은 삶 전체를 통해 켜켜이 쌓인 결과다. 그들의 삶과 비행 실력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이해는 용인이 아니다.


조종실은 정신 상담소가 아니며, 심리적 다름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실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CRM이 깨지는 순간, 비행기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CRM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기장은 위험을 감지해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때 언매치 제도는 개인 보호가 아니라 비행 안전을 위한 시스템 보호다.


비합리적 확신을 가진 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사실이 비행 안전을 침해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언매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예방이다.

비난이 아니라 안전이다.

기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비행의 리스크를 조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블랙’이 될 수 있다


블랙 기장을 논하며 끝낼 수는 없다. 우리가 그들을 피해 언매치를 신청하는 것처럼, 누군가도 우리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합리적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환상은 자신은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확신을 보면, 그것을 비합리적이고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끔 한다. 우리가 비합리성을 이해하고 의식하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확신, 경험, 자존심, 역할...

이 모든 것은 언제든 우리를 ‘블랙’의 감각으로 끌어갈 수 있다.


그래서 조종실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며, 절차가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이다.

슈테르처의 말처럼, “확신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늘 착각을 만들고, 그 착각 속에서 우리는 제정신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매 비행마다 자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왜 내가 옳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그 확신은 어떤 착각에서 왔는가?





확신을 합리와 비합리, 건강한 것과 병든 것으로 양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확신이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해도, 모두 가설에 불가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나와 다른 관점에 열린 태도를 취하고 세상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 책 본문에서-





참고 문헌

제정신이라는 착각(2023),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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