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투쟁이 남긴 영광스런 흉터다

달과 6펜스_서머싯 몸

by 가가책방
달과6펜스.JPG

어째서일까?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처 입히려 한다.


예술가의 고난의 시작 역시 '이해불가성'에 있다.

괴팍한 것을 참지 못한다. 제멋대로 구는 것을 내버려두지 못한다.

기어코 바로 하고, 붙들어 매어, 기를 꺾어야 마음이 풀리는 것만 같다.

그러면서 번번이 하는 소리란 이런 거다.
"다 너를 위해서다."

누구를 위한 것이든 그의 뜻이 꺾이는 순간 하나의 세상은 끝장나고 만다.

간신히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에 진흙탕 물을 쏟아붓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짓이다.

하나의 꿈과 함께 한 생명이 꺼지고, 그의 남은 삶은 어둠의 구덩이에 거꾸로 처박힌 화석처럼 굳어간다.


예술혼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육체적인 '체력'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박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력은 종종 안하무인식의 무례함과 혼동되기도 한다. 한 번도 예술혼에 이끌린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그들은 이해 불가의 야생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위험하고, 위태로우며, 가련하고도 가엾은 모순된 존재로 받아들여지거나 내쳐진다.

그러나 그들의 박력은 받아들여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꼭 이 소설 속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해서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 폴 고갱의 삶과 비슷한 부분은 타히티에서 쓸쓸히 죽어간 것뿐이라는 점과 예술혼의 지배 아래서 보통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쪽 삶이 더 극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소설 속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은 무지막지하게 극적이지만, 현실의 폴 고갱의 삶이 그보다 덜 극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예술을 향한 집념이 광기처럼 삶을 휘감았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의 시작은 느긋하고도 평화롭다. 어떤 소문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지루한 세계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나의 소문이 모든 지루함과 평화로움을 깨뜨리며 흘러나온다. 주식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가 일과 가족을 팽개치고 어떤 여자와 도망을 갔다는 것이 그 소문의 정체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찰스 스트릭랜드는 프랑스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었을 일과 가족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러 떠나겠다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온갖 비난과 원한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40년 이상 억눌려있던 예술혼은 더 이상 머뭇거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찰스 스트릭랜드 자신의 의지라기보다 예술의 의지처럼 보였다. 예술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도망치듯 떠났고, 자기 안에서 터져나올 것만 같은 영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과 인간의 생존 경쟁, 거기에는 편안함도, 안락함도, 아늑함도, 만족감도 없는 것 같았다. 죽느냐 혹은 사느냐의 투쟁이 있었을 뿐이다.


<달과 6펜스>는 두 번째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예술혼'이 있는가? 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혔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는 사람이 예술혼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가에 더 마음이 끌렸다. 작품을 그리지 못해도 미치거나 죽게 될 것이고, 작품을 그린다고 해도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삶을 두고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찰스 스트릭랜드는 이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저 그릴 수 있는 한 그리고, 그리지 못하는 동안 속을 끓였을 거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것이 더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병으로 몸의 감각을 잃고, 시력까지 잃어버린 후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하나의 기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그는 죽음의 아늑한 품에 안겼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남긴 작품들은 그의 고통과 피 흘림을 상징하는 흉터인 것만 같다. 단순화되고, 과장되고, 왜곡된 뒤죽박죽의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봤던 걸까?


세상의 모든 미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던 대범함과 강한 의지는 그가 갖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안에 임했던 예술혼이 불어넣은 것이었을까?


낡아빠진 구닥다리식 생각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지금의 삶과 광기 어린 영감의 삶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잠시 생각한 후에 후자를 고를 것이다. 잠시 생각하는 동안 지금까지의 내 삶에 안녕을 고하고, 고마웠던 세상과도 이별을 하고 싶다.


우스운 생각이란 건 안다.

그런 삶, 그런 기회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님도 안다.

원하지 않는다고 거부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폴 고갱이 자신의 원래의 삶을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없겠지만 아마 그 삶은 그의 그림보다 더 기묘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은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은 하나의 작품처럼 완성에 이르렀음을 실감하게 한다.

욕심인 줄 알지만 언젠가 내 삶의 마지막도 그처럼 어설프게나마 완결되기를 소망한다.



3493637537_db6995a396_b.jpg

타히티 섬의 주민들을 담은 것 같다.

개와 닭 등의 짐승과 석상처럼 생긴 신상, 거의 발가벗은 채 과일을 따고, 몸을 씻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섬 밖에 비해 섬 안쪽은 기이하게 어둡고 또 음울해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이 화가를 훔쳐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곁눈질을 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나는 예술을 보는 감각이 거의 없다. 잘 알지도 못한다.

소설 속 '나'가 그랬던 것처럼 이 그림이 어떤 점에서 특별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직접 본다고 해도 얼마나 나아질지 알 수 없고 말이다.

9699837368_8b4675efe8_k.jpg

과일의 정물 일부인 것 같다. 소설 속에 등장했던 그 그림처럼 보인다.

과일의 색깔이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다. 열대의 과일이라면 색이 화려 할 텐데 오히려 칙칙하니 말이다.


사실은 이 그림이 폴 고갱의 것인지 아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검색해서 나온 것 가운데 하나를 가져다 놓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목에는 흉터라고 적었지만, 사실 작품에서는 흉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야기 속 그의 삶이 흉터로 가득할 것만 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실제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무지함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지 않는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노래는 듣는 거지 읽는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