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이유 1 혹은 34

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by 가가책방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면서 언제까지고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일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인간이 두려워하는 망각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망각이 자발적인 것이든 강제적인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되고 어떤 사람은 아이히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망각이 주는 자유의 힘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남자는 읽던 책을 덮었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 적은 게 분명해 보이는 고딕체로 쓴 『망각의 힘에 관하여』라는 제목부터 대충 만들어 지어낸 K. DAVID라는 이름까지. 5분 후에는 이런 책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릴 것처럼 보이는 책이었다.

"역시, 헛소리군."

남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작가와 이야기라도 나누듯 소리 내어 말했다. 하지만 비판하거나 반박할 생각으로 한 이야기는 아닌지 가만히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남자의 생각은 자유보다는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망각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잊혀 지기를 두려워한다." 이번에도 소리 내어 말하기는 했지만 처음과 달리 조용조용한 것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생각의 추임새 같은 혼잣말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듯한 그런 말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끝냈는지, 그만뒀는지 남자는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언제나 책을 읽고 난 뒤에 남기는 감상일 게 분명했다. 남자가 감상에 적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한 권의 책에서 원하는 것은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을 발견하는 것이다"는 단순한 것이었고, 덕분에 거의 모든 책에서 한두 가지 정도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듭되는 발견이 있었기에 남자는 책에 질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고 싶었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남자는 책 속에서 언제나 자신과 마주쳤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사랑받고, 미워하고, 결국 잊히는 모든 순간의 자신을 보았다.

감상의 마지막에 남자는 이렇게 적었다.

"망각은 인간을 살아남게 하는 동시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만약 인간이 무엇도 잊어버리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기록을 기억한다면 미치거나 죽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망각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잊힌다는 것은 물론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에게 잊힌다는 것은 그 순간의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망각이 인간을 살리는 동시에 죽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이 남자가 금요일 밤에 한 일이다. 글쓰기를 마쳤을 때는 이미 토요일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책을 읽거나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이 때때로 극단에 치우친다는 것. 그러면서 그 극단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는 것. 이 남자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남자는 좀처럼 꿈을 꾸는 일이 없었다. 혹은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도 잠들었고 하니, 우리끼리 남자 얘기나 좀 더 하자.

남자는 금요일 출근길에 한 외국인을 봤다. 회색 눈에 금발의 흔한 외국인이었다. 옅은 갈색 면바지와 흰색에 복숭아 빛 줄무늬가 그려진 셔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이방인이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사실을 잊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외국인은 어떻게 느낄까?"

엉뚱하게도 남자는 그것이 몹시도 궁금했다. 지나치며 살펴본 외국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자신과 마주치던 그 순간에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오른쪽으로 가고 있을 때 홀로 왼쪽으로 걷던 그 우연한 장면조차 자신을 따돌리고 괴롭히려는 고의적인 장난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외국인이 지나가고, 남자는 계단을 올라 지하철 밖으로 나섰다. 파란 하늘이 거기 있었다. 그 하늘과 마주한 순간 남자는 좀 전의 외국인에 관한 것이나, 이방인에 대한 생각 따위를 몽땅 잊어버렸다. 그저 "가을은 깊어가고, 푸르름은 더해지겠지. 그리고 시름은 덜어지기를"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남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읽기였다. 그것이 책이든, 광고든, 사람이든, 세상이든, 하늘이든 그 대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든 조금 더 확실해지기를 바랐다. 분명하게 ‘알았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기를 바랐고, 그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생각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읽었다. 책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었다. 판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사고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었고, 마치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읽는 이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읽기 곤란한 존재가 여자였다. 오래전에 포기했으면서도 번번이 좌절시키는 신기한 존재가 바로 여성이라는 존재였다. 할머니부터 조카까지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자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사고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깨달은 것 하나는 이런 거였다.

"여자는 읽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솔직히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여자는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남자는 읽기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연애를 못했다.


주) K.DAVID : king David, 골리앗과의 싸움, 시편으로 유명한 다윗 왕이다. 물론 그가 저런 저서를 남겼나거나 저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 작가의 창작이다. 그러나 다윗의 행적과 그의 행적에 얽힌 야화들을 떠올리는 것도 재밌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