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꿈_리처드 바크
아주 오래전, 20년도 더 전부터 인간에 대해 생각하기를 계속해왔지만 여전히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말고는 알게 된 것이 없다. 조금은 알게 됐다고 믿었던 인간다움이나, 삶의 가치도 돌아보면 흐릿하고, 불분명해서 다섯 살 조카의 물음에도 답할 수 없는 수준임을 새삼 깨달을 뿐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어렸을 때 읽은 것을 합쳐 세 번 이상 읽은 책 가운데 하나다. 깊이 있는 이야기지만 쉬운 비유와 표현으로 적었기에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음이 매력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갈매기를 사람으로, 갈매기 사회를 인간의 사회로, 바다를 세상으로 바꿔 읽으면 이 세상의 이야기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이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삶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어떤 삶이 추구해야 마땅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식의 물음들 말이다.
지금까지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자신의 노력이 그를 다음 단계로, 더 높은 경지로, 깨달음으로, 넓은 세상으로, 자기완성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다른 풍경을 보았다고 느꼈다.
"어떤 위대한 인간도 스스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는 없다."
"나아갈 수 있다 해도 그 한계는 명백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인간 속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쫓겨난 세계의 미숙함 혹은 무지함을 알고도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 높은 경지에 오른 후, 자신을 박해하던 자들이 사는 무지의 늪으로 돌아갈 이방인이 실재할까?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한다. 보통의 갈매기들이 '먹기 위해' 비행한다면, 조나단 리빙스턴은 '날기 위해' 비행을 계속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날기 위해 목숨을 걸고 비행 연습을 하던 그는 무리에서 추방당한다. 불명예스러운 이방인으로서 말이다.
갈매기의 본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먹기 위해 나는 것이 잘못인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 빨리, 더 높이 날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삶은 나태한 삶인가? 이 역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더 높은 경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인간의 삶에서 자기완성, 혹은 자아실현이 중요한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갈매기가 더 빨리 날기 위해 번식을 포기하고, 먹이를 잡지 않으며, 날기에만 몰두한다면 이 세계의 갈매기는 멀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매기가 '날기 위한 비행'에 몰두하지 않는 것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이다.
하지만 반대로 '날기 위한 비행'을 추구하는 무리에 대한 견해 역시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기는 마찬가지다.
무리에서 쫓겨난 조나단 리빙스턴은 계속된 비행 연습을 통해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 온 갈매기들은 그를 데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로 간다. 그 세계에서 조나단 리빙스턴은 비행의 또 다른 경지를 알게 되고, 조금씩 배워나간다. 그리고 그의 배움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가 추방됐던 세계로 돌아가기로 한다.
어쩌면 그 세계에서 만나게 될 자신을 닮은 갈매기들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돌아온 조나단 리빙스턴은 냉대를 당하며,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비행 능력은 그들의 위협을 간단히 물리쳐 버린다. 어린 갈매기 몇이 그에게 배움을 청하기 시작하면서 갈매기 세계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세계로 떠나간다.
이 작품은 개인의 자아실현의 면모뿐 아니라, 종교적인 구원 혹은 깨달음까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종교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구원의 주체는 초월적인 신이 아닌 같은 세계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났으나 그 생각과 추구하던 가치가 달랐던 동일한 존재였다. 또 다른 경지에서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한 결과였던 거다.
많은 이들이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적인 도움이나 구원은 언제나 주변에서 찾아온다. 신을 모시는 이들은 그러한 도움들이 신의 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의 의지라 할 지라도 노력하고 애쓰지 않는 이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애쓰는 갈매기든, 노력하는 인간이든지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신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력하고 애썼던 그들을 닮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돕고, 가르치는 동안 더 높은 경지를 배우고 익혀나간다. 혼자만의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거다.
아무리 빨리, 높이 날 수 있다고 해도 조나단 리빙스턴 혼자만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가 닿은 경지, 이루어낸 비행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어떤 사회, 어느 세계에서도 혼자인 채로는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혼자가 아니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혼자인 동시에 혼자가 아닐 수 있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완전하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갈매기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이 작품은 자유로움을 깨닫는 것,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 자유로움을 완성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 속에 담긴 연대와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