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 있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_김새별

by 가가책방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JPG

아무도 모르는,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그런 죽음이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악인의 죽음이냐고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죽어간 사람들,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그가 남긴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홀로 오지 않지만 죽을 때는 혼자 죽는다"라고요.

하지만, 역시 혼자 맞는 죽음은 쓸쓸하겠지요.


이 책은 장례지도사로 일하다 고인들의 유품과 집을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된 유품 정리사가 남긴 죽음 후에 남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읽으며 묘하다고 느낀 것 한 가지는 고전 속에서 발견했던 깨달음들을 저자는 몸으로 보고 익히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남긴 작가들 역시 죽음과 유사한 경험과 생각을 품고 살았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책 속에 담긴 죽음은 대부분 혼자 지내다, 홀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병으로, 스스로, 혹은 범죄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사람들이요. 대부분의 죽음은 궁지에 몰린 인간의 가련한 편협함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하고 수십, 수백, 수천 번이나 스스로를 설득했을 그 과정.

죽을 용기로 살아가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절망 속에서 허우적이는 이들에게 그 말이 얼마나 같지 않았을런지요.


저자는 고독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독사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고독사는 그가 얼마나 고독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아, 그렇습니다.

혼자 죽어간다는 것,

그 죽음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고독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했던 삶의 증거였던 겁니다.

혼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이 책 속의 죽음들이 아주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죽음이라는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은 모두 달랐습니다.

죽음 뒤에 남겨지는 것은 정리라는 과제였습니다. 가족이던, 집주인이던 그 흔적을 지워야만 하는 것이지요.

죽은 자는 마지막까지 슬프고 외로워했을지 몰라도, 죽은 다음에는 그 슬픔도 외로움도 없던 것이 되었을 테니 사실 죽음 이후의 정리에서 유감을 느끼고, 화를 내고, 슬퍼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일종의 자기만족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를 가엾다고 하고, 원망하는 걸 보면 그것은 정말 자기만족이자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깁니다. 그렇게 가여웠다면 살아 있을 때 잘했어야 했던 거니까요.


우리 국어사전에는 '사신(死神)'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는데도 죽음은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죽음의 선고에 왜 나에게만? 하며 원망하는 일도 적지 않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과 나란히 나아갑니다.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도, 슬픈 것도, 원망스러운 것도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사신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에서 느낀 건 현대에도 여전히 죽음은 터부시 되는 개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복부인(福婦人)이라는 단어의 뜻을 아시나요?

'부동산 투기로 큰 이익을 꾀하는 가정부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요즘도 복부인이라는 말이 쓰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단어도 사전에 있는데 사신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게 재밌기도 합니다.


그런 인식 때문이겠지만 장례지도사, 유품정리사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밥을 먹으러 가도 식당에서 거절당하기 일쑤고, 사무실을 얻어도 오래 못 가 주민과 주변의 민원과 항의로 옮기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의하던 사람들도 죽음과 마주하게 되면 장례지도사나 유품정리사의 도움을 받겠지요.


고독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그때는 노인들과 노숙자들의 이야기만으로도 떠들썩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의 고독사가 급격히 늘어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고요. 더 안타까운 건, 이들의 시신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6개월 이상이 지나서야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30초만이라도 주변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일이 아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에게 그 문제가 닥쳐오면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저 뒤로 밀려나니까요.

몇 번인가 말했지만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는 건 그 상황을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받아들여야만 하게 될 무수한 불이익들이 자신은 피해갈 것처럼 기대하는 마음과 만약 자신이 '잘' 살아가지 못할 때의 변명거리로 삼겠다는 소극적인 사고의 산물이 헬조선입니다.


무엇이 헬조선을 만듭니까?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고독사를 만듭니까?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죽음은 더 바짝 숨통을 조여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강도를 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한 가정, 회사를 망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좇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요?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 돈을 끌어안고, 더 많이 모으려고 아등바등 거리게 될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쩔 수 없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풍요가 가난을 만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풍요롭게 지내기에 그보다 덜 풍요로운 사람들은 불행해집니다.

삶을 비관하고 자책합니다. 그 비관과 자책이 쌓여 삶을 짓누릅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고, 마음도 닫아갑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혼자 죽어가는 거지요.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모의 이야기는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몸까지 불편한 노인이 마지막 의지처였던 자식을 잃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겠지요.

자식은 왜 부모를 버렸을까요, 불편하고 힘들기도 했겠지만 역시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부모를 버린다.

아, 그렇게 남은 자식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을까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고민과 시름을 홀로 품고 지내다 결국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런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부모에게 잠깐 걱정을 끼치는 것이 목숨을 끊어 평생 짐을 지우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고 말합니다.

부모를 생각한 대견한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넣은 불효자식이라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인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진짜 삶이기에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게 묘하기만 합니다.

외로움과 우울이 공기처럼 세상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 시대입니다.

가족, 친구,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소중히 해야겠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보며 느끼는 것은 그 죽음의 안타까움이 아니었고,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니,

문득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합니다.

떠난 후에 남겨둘 것들 조금씩 생각하며 남기도 또 비우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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