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영원하다.

기억 전달자_로이스 로리

by 가가책방
기억 전달자.JPG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이 떨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죠. 다만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겪지 않고, 고난에 힘겨워하지 않으며,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고통이 없는 삶.

죽음이 사라진 세계.

그런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The Giver>, 기억 전달자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마법과 같은 진통제가 있어서 어떤 통증도 간단히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발달된 과학 기술로 햇빛과 같은 자연환경을 완전히 통제하고 조절해서 자연재해라는 것도 없지요. 모든 언덕이 사라진 세계, 평평한 이 공간에서는 언덕을 오르는 것과 같은 고난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이 세계에는 '임무 해제'라는 개념이 있을 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난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세계.

이 세계는 사람들이 선택한 세계, 선택이 완성시킨 유토피아입니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면 이 세계는 무척 미심쩍은 구석이 많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없다는 것은 물론 죽음이 없다는 것이 가장 미심쩍어 보이는 겁니다. 무엇보다 '임무 해제', 이 단어는 처음 읽은 순간부터 뭔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정도 세계는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과학적 성취에 도달할 지도 모릅니다. 거의 모든 것이 통제된 세계이면서 모두가 그 통제를 바라는 그런 세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세계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가족 간에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가정은 엄마와 아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자녀는 아기가 태어나 '정상'이라고 판단이 된 후에 가정에 분양됩니다. 마치, 애완동물처럼 선별 후 분양되는 겁니다. 또한 태어나는 아이 수 역시 정해져 있습니다.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에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두 아이 가운데 더 가벼운 아이를 임무 해제시켜버립니다.


이 세계 구성원들의 직업은 일정 연령이 되면 원로들이 직접 정해줍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교육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정해진 직업은 거의 틀림이 없지만 정말 적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직업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생활하는 환경 속에 있는 것들만 기억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일이 없기에 눈이나 비에 관한 기억이 없고, 추위나 더위에 대한 기억도 없습니다. 사실 이런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빙하기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과거에 대한 교육 조차 받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거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와 계속될 미래뿐입니다.

기이한 것은 이들에게는 가족의 사랑이나, 애정에 대한 기억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족 간에 집착하거나 애착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마치 절대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침이 정해지고 지시가 내려오면 기계적으로 모든 명령을 이행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언어가 통제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합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적합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언어는 단속적이고, 분명해서 모호하지 않습니다. 감정에 관한 표현은 거의 없고 목적에 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유대를 형성하거나 키우는 표현은 쓰이지 않고 그런 놀이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별개의 인간으로 키워지는 거죠.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이런 이유들이 이 세계에 한 존재가 필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바로 '기억 보유자'입니다.

기억 보유자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가장 인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최후의 인간이 바로 기억 보유자인 것입니다.

'기억 전달자'는 이 기억 보유자의 임무 해제가 가까워졌을 때 후계자를 정하고 기억을 전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기억 보유자는 인간이 가진 감정에 대한 기억과 동시에 고통과 비참에 대한 기억 역시 갖게 됩니다.

기억 전달자는 새로운 기억 보유자로 뽑힌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기억까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 보유자가 없다면 이 세계는 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가르침들을 전할 수도, 조언을 해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품으로 보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의 기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품이 바로 기억 보유자인 셈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앞으로, 어쩌면 정말 머지않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세계가 필요하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통제'라는 생각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겠죠.


기억이 왜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에 대해 묻자 기억 전달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조너스 네가 강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해서 기억도 너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란다. 기억은 영원하기 때문이지."

기억이 사라진 세계에서 '기억은 영원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혼란을 막기 위해 기억을 남기지 않는 세계에서 기억이 영원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하지만 기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기억이 갖는 가치는 단순한 회상에 있지 않습니다. 기억을 통해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아끼고 존중하는 지혜를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을 기억 보유자에게 떠맡겨 놓았던 이들에게 그 기억은 크나큰 혼란이 되겠지만 그 혼란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익숙해질 테니까요.


기억을 갖고 있는 기억 보유자와 기억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기억이 없다면 아이들은 결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애셔와 피오나에게 크나큰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두 친구 역시 기억들 없이는 조너스와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또 두 사람에게 기억들을 건넬 수도 없을 것이다. 순간 조너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기억을 갖고 있는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기억은 전혀 별개의 존재인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을 만났을 때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경험을 한 번씩은 해보셨을 거예요. 하지만 반대로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이 없다면 사람들은 영원히 서로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기억 전달자>의 세게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온 하나의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 역시 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암묵적인 규칙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그 규칙을 어기거나 벗어나는 존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즉시 '임무 해제'가 기다리고 있는 거죠.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인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규칙을 어긴 사람 혹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라졌음에도 아무도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이중사고' 또한 기가 막히게 작동합니다. 그 모든 것은 언어와 기억을 통제하는 것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소마'라는 약의 존재가 감정과 기억과 욕망을 통제하게 합니다. 유토피아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지만, 그들의 세계 역시 순수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었지요.


<기억 전달자>의 세계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닙니다. 적어도 아직은요. 그것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제자, 압제자가 기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억이 지배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이 세계 역시 드러나지 않았던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괴로운 기억을 잊고자 합니다. 좋은 기억만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괴로운 기억이 없이는 좋은 기억의 가치 역시 실감되지 않는 법입니다. 세계가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사람의 감정 역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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