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과 파멸이라는 문명의 운명

문명의 우울_히라노 게이치로

by 가가책방
문명의 우울.JPG


"쇠락하지 않는 운명은 없다."


왜 책의 제목을 <문명의 우울>로 했을까를 생각하다 떠올린 사실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문명의 발생이 필연이라면, 파멸 역시 필연이다.

인간의 탄생이 필연이라면 죽음 역시 필연인 것처럼.


이 책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일상적인 소재를 가져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인간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현대의 세태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 붙은 제목이 <문명의 우울>인 거다.


애완동물에서, 로봇과 인간, 휴대전화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다르고 시간도 다르지만 그 소재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이야기는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보며 조금 웃었다.

'아아, 그렇지. 정말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문명이 쇠락할 것을 내다보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문명이 너무나 발달했기에, 사람들이 그 문명의 성장만큼 성장하지 못했기에 생겨나는 혼란과 한계가 '인간'인 히라노 게이치로를 상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애완동물의 필수조건이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로봇 강아지는 애완동물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강아지라면 따뜻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발달한 기술은 그 온기를 재연할 것이다. 병원에 가듯 정비소를 찾고, 밥을 먹이듯 윤활유를 치고, 충전을 할 것이다.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애완동물의 필수적인 조건이란 '함께할 것'이 아닐까 싶다. 함께 놀고, 함께 자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런 의미라면 반드시 생물학적 의미로 살아있을 필요는 없어진다. 반대로 살아있음에도 버려지는 애완동물들을 보자. 함께하지 않게 된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애완동물이 아닌, 길 위의 '짐승'으로 격하된다.

문명이 만들어낸 외로움, 결손이 애완동물에 대한 필요를 부추기더니 결국에는 문명에 익숙해진 인간의 지루함 혹은 무책임함이 애완동물이었던 것을 내다 버리게 한다.

이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최근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세계는 '알파고 쇼크'라고 하며 인공지능 발달의 현주소가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을 위협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로봇이,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한다. 터미네이터, 메트릭스의 디스토피아를 떠올릴만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현재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인간이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은 누구인가? 인공지능인가?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도,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위협도 아닌 인간 자신의 비인간화다.


발달해 가는 문명은 비자발적 인간, 창조적이지 못한 인간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소위 '소박한 사람들'로 치장되던 수동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위협에 직면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약자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침몰해가는 문명, 스스로 파멸해가는 인간 존재들.

이 현실 역시 몹시 우울한 일이다.


스마트폰은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좋은 소재다.

언제나, 어디서나, 원한다면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마법의 도구. 그런 이유인지 바로 앞에 있는 친구와 연결이 필요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한다. 불과 50CM 앞에 있는 친구와 웃음을 나눌 때도 스마트폰으로 나눈다. 더 무서운 것은 스마트폰 속에 아무리 즐거움과 웃음이 넘쳐도, 그걸 들여다보는 이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는 순간이 많다는 것이다.

거짓.

스마트폰은 거짓을 진실처럼, 아무렇지 않게 전하는 비극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사람 앞에서 가면을 쓰는 것조차 대신해주는 기술, 문명의 편리함이 사람과 사람을 멀어지게 한다. 동시에 사람들은 연결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려고 안달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어지려고 안달하면 할수록 그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되어버린다.

상처받은 사람, 배신당한 마음은 더 깊이 숨어버리고, 격리되고자 하면서 연결되려는 모순된 소망은 갈증을 더해간다. 그것이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상징물의 우울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을 늘어놓듯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무엇 무엇 때문에 문명은 우울합니다'라고 명시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달랐을까, 내게는 그의 직접적이지 않은 말들이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그러저러한 우울들을 드러내는 것처럼 읽혔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문명은 발생해서 발전하다 쇠락하고 파멸하는 것이 필연이기에 우울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울함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울한 것은 그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다.

하찮아지고, 소중해지고자 하고, 멀어지고, 연결되고자 하고, 끊어지고 가까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발버둥이 무엇보다 우울하게 느껴지는 거다. 스스로 만든 늪에 스스로 가라앉는 줄도 모르고 발을 들이는 존재.

그 가련함이 또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우울함이란 문명이 지닌 속성의 일부분이다. 부정적인 것이 커 보이는 것, 더 치명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늘 그래 왔다. 부작용을 알면서도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은 부작용보다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문명의 우울함이 있다면 문명의 환희 역시 존재한다.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문명은 무수한 환희와 기쁨, 기회를 가져다준다. 도구란 그 자체로는 인간을 우울하게 할 수 없다. 그 도구를 대하는 태도가 우울함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다지 힘들여 쓴 것 같지 않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짧은 생각들이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고,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우울함이나 절망에서가 아니라 희망에서였을 거라고 믿는다.


적당한 우울함은 삶을 나아가게 하는 동기가 된다. 공기는 순수한 산소로만 되어 있지 않다. 가볍게는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때로는 치명적인 독소들도 섞여 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이 인간이 숨 쉬는 것을 도와주고 유지해준다.

달콤하기만 한 것은 삶이 아니다. 그런 삶에 만족해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사람 혹은 문명을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그리고 또 한 가지.

발생과 번영 또한 문명의 운명임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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