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솜씨로 그려낸 자화상

스토너_존 윌리엄스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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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거의 완벽하다. 서툰 것은 이 작품을 읽는 나와 이야기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처럼 비치는 나의 생각들이다.

아,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려는 시도의 무모함처럼, 나는 이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할 수도 조금이나마 이해시킬 수도 없음에 좌절한다.

그런 이유로 이 감상은 나의 자화상, 서툰 솜씨로 흉내 낸 미완성의 자화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임을 안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 그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이며, 하나뿐인 아들이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배워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학에 보낸다. 대학에 간 아들은 영문학 수업을 듣다가 자신이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영문학으로 전공을 옮기고, 졸업하기에 이른다.

졸업식에서 아들을 만난 부모는 자신들에게 아무 말 없이 진로를 택한 아들을 조금도 탓하지 않는다. 아들 역시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가 대학원에 다니던 시기에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그의 친구 둘은 참전을 결정하지만 그는 대학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두 친구 중 하나는 첫 전투에서 죽고, 다른 친구는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다.


역시 줄거리를 적는 것으로는 이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줄거리를 적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간단히 적자면 이것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여러 번 거듭 읽을 책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어나가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토너』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거듭 읽어나갈 책 가운데서도 앞쪽에 자리 잡고 있는 책이다. 어쩌면 일 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쯤 읽어도 여전히 좋을 작품. 그런 작품이다.


아쉬운 것은 아직 설익은 나의 삶으로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얕고 좁은 삶에는 너무 작은 공간밖에 없기에, 그 작은 공간을 촘촘하게 채워도 여전히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 작품을 좋아하는가?"하고 누군가 물었다. 대답은 몹시도, 정말 몹시도 궁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거짓이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조급하고 서툰 말로 줄거리를 늘어놓다가 그만두었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었다. 의미, 이 이야기의 의미야말로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너무나 식물 같은, 절제되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 간 흐릿한 회색빛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읽어가는 동안 그 밋밋하고 평범한데다 고요하기까지 한 순간순간에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이 비치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나와 전혀 무관한, 조금도 닮지 않은 한 남자의 이야기임에도 어느 순간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런 충격,

아무리 서툴게 그려도, 그것을 그린 나만은 그 그림이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임을 깨닫는다.

부끄럽지 않은, 그처럼 서툴러도 창피하지 않은, 나 자신이 거기 있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음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_160쪽

우리는 상상한다. 스스로의 모습을. 하지만 그 상상 속의 모습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상상을 거듭한다. 특히 자신이 삶을 통해 얻어낸 것을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조금 더 뚜렷하게 스스로를 증거 한다. 스토너는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자신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며, 그 깨달음은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적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며, 세상 역시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해도 그 깨달음을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깨달음 자체를 부정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명하게나 표현할 수 없다고 해도 그 깨달음은 전해진다. 설명하는 것과 알아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의 일이므로.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_353쪽

열정은 반드시 격하게 불타오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마다, 순간마다 열정을 바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의 깨달음처럼 의식하지 못했을 때야말로 모든 것을 인생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이라거나 마음의 열정이라거나 하는 것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랑, 열정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삶을 납득시키고 증명하는 일이 바로 인생에 열정을 주는 것이다.

서투름에 실망하고 만다. 서툴다 서툴다 해도 지나치게 서툴다.

아직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어려운 것 같다. 그저 스스로 읽고, 발견하고, 느끼는 것 외에는. 타인의 삶에 있어, 타인인 나는 어디까지나 완벽하고도 철저하게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무력하므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도 있게 되는 것 아닐까.


몇 번쯤 읽고, 그 안에서 얼마나 나를 발견해야 이 이야기를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내게 의미를 갖게 된 이유는 별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지금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의미 있음을 확인시켜 주며, 설사 삶에 어떤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그 삶이 무의미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식물의 삶을 수동적이며, 고정적이고, 느리고도 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식물은 그 싹을 틔우는 순간부터 대지를 향해 뿌리를 뻗으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도전을 계속하며, 중력에 저항해 줄기를 세우고,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활발하게 숨을 쉬고, 한 순간의 쉼도 없이 몸 안에 활력이 달리게 한다.

스토너의 삶은 그런 식물을 닮았다.

단조로운 삶을 단련시키는 고요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풀무의 불꽃처럼.


너무나 서툰 나의 솜씨를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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