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아이들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by 가가책방
앵무새 죽이기.JPG


세상에 책은 많고도 많습니다. 책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기준이나 방법도 아주 많지요.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도서관에서 하듯 특정 분류법에 따르기도 하고, 분야나 장르, 국가, 작가, 출판사로 나누고, 모을 수도 있겠죠.

단순하게는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읽을 책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방법이 있다는 거죠.

『앵무새 죽이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을 때,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겠더군요.

'읽은 책'

'안 읽은 책'

'읽은 줄 알았는데 안 읽은 책'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읽은 책'

여기까지는 생각해 본 분들이 여럿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를 더 보태기로 했어요. 바로,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읽다가 만 책'입니다.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읽다가 만 책'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건 아니기에 먼저 『앵무새 죽이기』부터 들여다보죠.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한 주(州)인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 군에서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 청년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죄로 기소됩니다. 남북 전쟁으로 노예에서는 해방이 됐지만,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이 여전했죠. 재판을 한다고는 하지만 판사도 검사도 배심원도 모두 백인이었고, 흑인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려는 변호사도 없던 시절입니다. 톰 로빈슨은 사실 누구도 강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선했고, 흑인이면서도 가엾은 처지에 있는 백인을 불쌍하게 여겨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이었죠. 하지만 톰 로빈슨은 친절의 대가로 기소되었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화자인 '스카웃', 진 루이즈 핀치의 아빠인 에티커스 핀치에게 톰 로빈슨의 변호가 맡겨진 거죠. 에티커스 핀치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심성을 지닌 올곧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흑인을 변호하는 사람이 감수해야 할 비난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죠. 오히려 어린 아들과 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참아달라고, 견뎌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들 젬과 딸 스카웃은 그런 아빠의 부탁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인 셈이죠.

『앵무새 죽이기』는 톰 로빈슨의 사건과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 메이콤 군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많고도 중요한 많은 의미와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던 시대의 비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를요.


이 책의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인 까닭을 생각해봤습니다. 몇 가지인가가 떠올랐는데 제일 마음에 가는 건 이런 거였어요.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앵무새 죽이기』中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의 말입니다. 무해한, 듣기 좋은 노래를 부를 뿐인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라는 거죠. 앵무새가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면, 피부색과 인종으로 차별받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도 읽힙니다.


일을 시키거나 부릴 때는 편리하고 쉽게 대하면서도, 자기는 차별이나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심지어는 타국의 독재자의 만행과 차별을 증오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차별을 행합니다. 그 차별이 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까지 갈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혐오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나 외부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야 마는 거죠.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인간을 죽이고도 죄책감도 없이 금세 잊어버리는 무감각의 비극.

이러한 비극에 화를 내고, 울음을 터뜨리는 건 오직 아이들 뿐입니다.


제게 『앵무새 죽이기』는 한 번이나 두 번 읽는 걸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이렇게 감상을 적고는 있지만 불분명하고, 어지럽고, 희미하고, 복잡한 상태죠. 사실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유명한 작품이 지금, 이 시대에 읽힐 가치가 있는 걸까?"하고요.

절반을 읽고도 뭔가 중대한 의미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이야기, 미국의 이야기로 읽혔죠. 그러다가 백인들이 흑인에게 내린 평결과 이후의 일들을 읽으며 지독하게 현실과 닮아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많은 것이 나아졌음에도 뭔가 결정적인 것에서는 제자리걸음이거나 더 나빠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특권과 편견과 오해, 결코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과, 절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남의 일,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나요?


제대로 읽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완독 하기는 처음이라 지금은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운 솔직한 마음으로요. 물론 아이들이 무조건 선하고 착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앵무새 죽이기』속의 젬과 스카웃과 딜과 같은 마음이면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읽다가 만 책'이 『앵무새 죽이기』라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다 읽은 듯하고 다녔던 걸 생각하니 부끄럽네요.

『앵무새 죽이기』를 처음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아마 그때의 저도 이번에 절반을 읽는 동안의 저처럼 이 유명한 작품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했을 겁니다. 재판의 결과가 예상했던 그대로 나오는 걸 보며 읽기를 그만뒀는지도 모르죠.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그렇게 해서 『앵무새 죽이기』는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읽다가 만 책' 1호가 되었습니다. 시시한 이야기죠.


워낙 유명한 책들은 제목도 줄거리도 익숙하다 보니 읽은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시 읽겠다고 책을 펴고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당황하는 동시에, 읽은 적이 없음을 떠올리는 일이 드물지 않죠. 우스운 건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겁니다. 안 읽었다고 생각해서 사거나 빌려서 읽다 보면 읽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거죠. 어느 경우나 우습고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런 일들이 전혀 무의미한 건 아니라는 데서 그나마의 위안을 얻게 됩니다.

읽다 말았지만 결국 다시 읽게 되었다는 운명과 읽은 기억은 잊었지만 다시 끌려 책을 펼쳤다는 필연을 다시 실감하고 보면, 더디더라도 인생의 책들은 언제나 나를 찾아오거나, 내가 찾아감으로써 만나게 된다는 확신이 생기는 거죠. 이런 확신이 위안이자 기쁨이 되어 조금씩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감상을 마치며 에티커스 핀치가 진 루이즈에게 가르쳐 준 요령 하나를 적습니다.

"우선 첫째. 스카웃, 네가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앵무새 죽이기』中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건 사실 불가능하고, 오히려 불필요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더군다나 살아온 시간도 경험도 다른 '그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알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이런 의문들이 있을 수 있겠죠.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해를 시도하는 건 의외로 쉽고 간단합니다. 그 사람과 나를 바꿔서 생각해보는 거죠. 물론 당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한 번 해보는 겁니다.


"난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 자주 하시나요?

당연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노력하고 애써가며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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