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일상.
국어사전에서는 일상(日常)이라 적고, 명사로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고 풀고 있습니다.
'반복'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지루한 것이라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반복은 뭔가 발전하거나 나아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답답한 상황을 연상시키니까요.
일상의 소중함은 다른 많은 것이 그러하듯 잃어버렸을 때 실감하게 됩니다.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던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때가 종종, 그러나 반드시 찾아오는 거죠.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은 한강철교를 지나갑니다. 다리 위를 지나갈 때면 문득 깨닫곤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거창한 깨달음은 아닙니다. 단지, 저의 일상이 지하철 객차 안이라는 닫힌 공간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리 이쪽 편만이 저의 일상의 무대가 아니라 다리 건너편 역시 일상의 무대가 되는 것처럼, 객차 안뿐 아니라 밖 역시 저의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는 거죠.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겁니다.
매일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하루 일과가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거듭 일어난 적 없는 유일한 순간들이 모인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일상이라는 명사를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고 풀어 버린 건 한쪽 면만을 생각한 반쪽짜리 설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조금만 시선을 멀리 하면 전혀 다른 일상이 시작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건 상황이 동일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시간을 지루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거죠. 변화의 여지,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거죠.
『연인』이야기는 할 생각 않고 일상 이야기를 먼저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조금 해보죠.
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인『연인』은 이제 한 번 읽었을 뿐인 제게는 사실 대단히 난해한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한 번 더 읽어보면 더 나아지겠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연인』의 주인공은 미성년의 소녀입니다. 베트남 태생의 순수한 백인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라게 되죠. 위로는 큰 오빠와 작은 오빠가 있지만, 작은 오빠는 소녀가 열다섯 살이던 해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병들어 죽게 됩니다. 작은 오빠가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엄마는 큰 오빠에게 집착에 가까운 희생을 보이고, 큰 오빠는 교육받지도, 일을 하지도, 돈을 벌지도 않으며 건달처럼 하루하루를 보내죠. 엄마는 소녀의 행실과 출입을 단속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방치하기도 하는 모순된 모습으로 소녀를 대합니다. 소녀는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하지만 엄마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한 중국인 억만장자를 따라가서는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집니다. 이렇게 적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만큼 지금도 혼란스러운데, 소녀는 '그렇게 될 것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건 그 중국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중국인 남자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할 것을 '알고', 중국인 남자 역시 소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것을 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열다섯 살 반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처음 보는 이방의 남자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창녀처럼 대해달라고 하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결국 소녀와 중국인 남자는 헤어지게 됩니다. 소녀가 프랑스로 돌아감으로써 저절로 끝이 난 거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줄거리까지 쓸 기력이 없군요.
이제 일상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일상이라는 건 단순히 반복되는 생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규칙성이라는 것,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미래의 존재를 확신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첨예한 불안, 예측 불가능한 변화는 심신의 안정을 빼앗아 갑니다.
소녀가 보이는 예언적이고 운명론적인 행동이나 말들은 안정된 일상의 상실에서 생겨난 불안과 더불어 남편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의지할 데 없이 사는 동안 황폐해진 엄마의 존재를 대신해 줄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 있습니다.
일상이 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아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 역시 일종의 광기 혹은 반항으로 읽을 수 있겠죠. 부서지기 전에 부서뜨리겠다는 자기 파괴 본능의 작용인 지도 모릅니다.
소녀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연인』- 中
소녀는 '슬픔'이 연인이라고, '불행 속으로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에 빠져야 했을 것이고, 서로를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될 걸 알면서도 미련 없이 헤어져야 했던 것이라는 결론에 닿을 수 있던 것 아닐까요.
흔히 지겨운 일상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사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지겨울 수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루하고 지겨울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매일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때가 더 많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일상을 지켜내는 데 있어 '물질'적인 환경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연인』 속 소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 혹은 사람 사이를 흐르는 애정입니다. 소녀는 엄마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지만 엄마는 사랑해주기는커녕 불행을 예고하고, 저주합니다. 견디기 쉬운 일일 수가 없죠. 가장 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자신을 저주한다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물질적인 일상도, 정서적인 일상도 잃어버린 소녀가 부서질 듯 광기 어린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작 한 번 읽고,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쓴 감상이기에 나중에 다시 읽으면 분명 웃게 되겠죠. 하지만 제게는 이것이 일상을 채우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줍니다. 읽고, 쓰고, 다시 읽어보고, 예전의 자신을 돌아보고, 이런 모든 과정이 일상이 되는 거죠.
반복이라는 말은 '동일하다' 혹은 '똑같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으로 '비슷하다' 정도의 의미로 쓰는 거겠죠.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하루 또 하루의 의미는 반복되는 것도, 똑같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 순간의 한 걸음, 손짓 하나가 지금까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지요.
꼭 기억하세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시간 속에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