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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감상실
by 글쓰는 감상가 서동민 Dec 18. 2016

비판적 신문 읽기를 권함

신문과 언론은 그렇게 솔직하지만은 않다

오래전 일이지만 신문을 구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문 구독을 신청했던 이유는 '시사상식과 국내외 정세가 궁금해서'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설을 읽으면 논리력이 향상된다고 하는 이야기, 혹은 '신문을 구독하면 주겠다고 약속한 자전거' 같은 1차원에 가까운 단순한 이유였죠. 

 그 후로 오랫동안 신문을 사거나 구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2016년 12월 9일 전까지는 말이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각 신문들이 어떻게 이 일대 사건을 다뤘을지 궁금함에 12월 10일 토요판 신문 7부를 샀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등등해서요. 모든 신문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가결을 대서특필하고 있었습니다. 지면의 분배나 헤드라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죠. 하지만 이 책 『신문 읽기의 혁명』을 읽으면서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소한 차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실제로는 콩에서 콩이 나고, 팥에서 팥이 나는 것처럼 '결정적인 견해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신문 읽기의 혁명』은 신문을 읽던 중에 추천받아 읽게 된 책입니다. 신문은커녕 인터넷 기사도 제대로 읽지 않는 요즘에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일이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누가 신문을 읽어?"라고요. 멀지 않아 신문이 사라질 거라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문 읽기의 혁명』의 손석춘 작가는 신문의 '속성'을 알려주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읽으면서 납득하게 되었는데, 신문은 단순한 '소식지' 혹은 '알림'의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알고 계시듯 거의 모든 신문사의 사주 혹은 대주주는 재벌, 대기업, 종교단체입니다. 언론사에서 흔히 외치는 '공정보도'라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도 재벌과 정부의 입맛에 맞게 기사를 쓰고, 읽게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과거의 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는 과거 정부의 언론 단속과 그때 언론이 보여준 수치스러운 면모를 낱낱이 분해해 보여줍니다. 


 작가는 신문이 단순히 지면에 인쇄된 '뉴스'를 싣는 죽은 사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신문의 기사와 편집의 뒤에 숨은 '살아있는 의도'를 읽을 때 진정한 신문 읽기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먼저 손석춘 작가는 신문 편집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기사가 쓰이고, 편집되어, 표제(헤드라인)가 달리고, 어떻게 배치되는지. 기사 작성에서 인쇄까지의 과정을 짚어가며 어떤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신문에 인쇄된 기사가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쓴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취재기자가 있고, 편집기자가 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검토되고 고쳐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된 거죠. 

 

 '신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광고'입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이 출간된 1997년에 이미 신문의 광고 비율이 50%를 넘었다고 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죠. 지금도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대기업의 스캔들에 관련된 기사의 경우 좀처럼 보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두고 '압력'이라고 하는데, 광고비에 대한 의존이 크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각 신문의 '주필' 혹은 '논설위원'이 쓴 '사설'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사설이 논리적인 글쓰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신문사들의 입장과 태도를 가장 명확하고 명백하게 보여주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문 전체가 사설에서 주장하는 관점에서 편집되고 기사를 쓴다고 봐도 될 만큼 사설의 비중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겁니다. 

정권으로 상징되는 정치권력과 광고주인 대재벌들의 경제권력이 신문 편집의 자율성을 굴절시키고 위협하는 외부적 힘이라 한다면, 그 안에서 그들과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편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말살하는 내부적 힘에도 독자들은 주목해야 한다.
『신문 읽기의 혁명』중


 작가는 신문이 '살아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게 될 텐데, 기사를 쓴 기자가 살아있고, 기사 편집에 의도를 담는 권력 혹은 자본 혹은 진실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다는 의미도 될 겁니다. 단순한 사실의 전달, 표면적 텍스트 읽기에 치중한다면 우리의 신문 읽기는 실패하기 쉽고, 누군가의 의도에 지배당하기 쉽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작가는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비판적이고 심층적인 읽기가 필요하고, 균형 잡힌 견해를 갖고 있을 때 신문을 바로 읽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원하는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죠. 하지만 정보가 많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정보를 가려서 볼 수 없다면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독이 될 테니까요.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곧바로 정보의 민주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과다한 유통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은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 정보를 걸러줘야 함에도 전혀 그렇지 않은 채 방치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의외로 심각할 수 있다. 오히려 정보 홍수 속에 익사할 위험성이 높은 것이다. 
『신문 읽기의 혁명』중

 어느 시대에나 '정보'는 귀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손에 쥔 자가 권력을 쥐기 쉬웠고, 부유함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죠.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정보를 갖고 있는 자들은 부패하기 쉽고, 왜곡되고 굴절된 정보가 흘러 넘 칠 위험도 커집니다. 정의로운 기자가 있어 진실만을 전해주면 좋겠지만, 신문의 속성과 구조적 문제는 정의로운 기자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거짓 속에서 진실을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독자인 우리에게는 최선이 되는 겁니다.


 정보라는 문제에 있어 가장 난감한 상황은 언제일까요? 

정보가 전혀 없을 때일까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정보가 지나치게, 너무나 많을 때가 진정 난감한 상황이라고요. 정보의 홍수 얘기에서도 적었지만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처럼, 비슷해 보이는 것들 속에 있으면 구별하기 어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진실이 거짓과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도 너무  많은 '진실'이 난무할 때입니다. 100가지 정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100가지 정보를 '거짓'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거짓 정보는 몇 개일까요? 50개일까요? 60개? 저는 단 하나의 거짓 정보만 섞여 들어가도 100가지 모두를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10가지 정보 중에 10가지 모두가 진실일 때와 50가지 정보 중에 49가지가 진실일 때를 생각해보면 진실은 39개 늘었지만 거짓이 1개 섞임으로써 '비율적으로'는 덜 진실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진실과는 별개로 그것을 믿을지 의심할지는 개인적인 판단에 달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제를 예로 들자면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퇴진을 요구하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개인당 5만 원씩 받았다는 말을 믿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퇴진을 요구하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인당 15만 원씩 받았다는 말을 믿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정황을 포착 보도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양쪽 모두 '돈을 받고'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속한 쪽에 있는 사람들은 '받지 않았다'라고 믿는 걸로 끝이 나는 걸까요? 

저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촛불집회에 참여했지만, 타의에 의해서도, 돈을 받고 나간 것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집회에 나가서 감옥에 계시는 누군가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함께 냈다고 합시다. 그러면 신문은 이렇게 보도할 수 있습니다. 

"서동민 씨, 광화문 집회에서 범죄자 석방을 지지하는 발언 해 논란"

저는 누구를 지지한 적 없지만,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를 따라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악의적 편집'이라는 마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조차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게 편집이라는 마법이라는 거죠.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 말하는 걸 단순화하면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 신문을 읽는 안목을 키우라는 겁니다. 신문뿐 아니라 언론 혹은 정보를 대하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특성 가운데 '배타적 증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그룹 안에 있는 이들의 의견이 모두 동일하다면 세상의 의견 역시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닫힌 사고의 강화를 두고 배타적 증폭이라고 하는 거죠. 

 분명 단호하고 분명하며 명백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완전히 닫히고 막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정보가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입장 또한 존재합니다. 입장에 따라 정보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받아들이는 사실 또한 다를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이 코끼리를 만질 때 저마다 진실을 말하지만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종합적이고 조금 더 커다란 사고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혁명의 개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거대한 힘이 완성되어 혜성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신문 읽기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문 속에 '숨은 권력'의 의도를 간파하고 진실을 요구하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면 우리는 덜 수고롭게, 진실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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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직업큐레이터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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