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Jan 08. 2017

인간의 광기, 그 너머를 보다.

인간을 저주하는 건 언제나 인간 자신이다.

<모비딕>_허먼 멜빌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입니다. 

아마도 호승심에서였을 텐데, 두껍고 빽빽한 글자가 가득한 <백경>이라는 책을 덜컥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책이 <백경> 하나는 아니었을 텐데 굳이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읽기 힘들지만 재밌었다는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백경>은 에이해브라는 포경선의 선장이 모비 딕이라는 향유고래를 잡으려다 한쪽 다리를 잃고 복수심으로 선원을 모아 출항했다가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백경>의 원제목은 <모비딕>입니다. 이제부터 감상을 적을 책과 같은 이야기죠.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이 같은 책이듯, <백경>과 <모비 딕>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탓이었을까요, <모비 딕>을 읽는 건 망망대해 어딘가를 헤엄치고 있을 모비 딕을 쫓던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느꼈을 막연하고도 막막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비 딕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이 사라졌으니, 역시 닮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앞서 <백경>을 이야기하며 적었듯 <모비 딕>은 복수심에 불타는 포경선 선장 에이해브가 다시 선원들을 모아 바다로 떠나,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래'라는 생물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신의 사자 혹은 괴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허먼 멜빌은 화자인 이슈마엘을 통해 고래에 관한 역사를 한 차례 훑어보인 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래가 어떤 존재이며, 생태는 어떠하고, 인간과 고래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를요.

 이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증명하고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의 포경선 이름은 '피쿼드 호'입니다. 이 배의 선원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에 이슈마엘은 특별히 '어떤 일을 하겠다'는 목적도 없이 새롭게 사귀게 된 식인종 친구 퀴케그와 함께 찾아갑니다. 그런데 선원에 지원하러 가는 그들에게 한 남자는 '저 배는 저주를 받았다'며 그만두는 게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꺼림칙하기는 해도 두 사람 중에 저주가 두려워 배에 오르는 걸 그만둘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피쿼드 호는 선원 모집을 끝내고 출항을 준비합니다. 적당한 바람을 받으며, 항구를 떠난 배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배 안의 기름통을 가득 채워 돌아올 꿈에 부풉니다. 

 먼 바다에 나왔을 때 선장인 에이해브는 자신의 목적이 모비 딕에게 복수하는 것임을 선원들에게 밝힙니다. 일부 선원들은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광기 어린 에이해브의 집념에 휩쓸려 모비 딕을 쫓기 시작합니다. 모비 딕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선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에이해브 선장은 다른 고래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사를 건 모비 딕과의 사투가 시작됩니다. 

 괴물, 귀신고래, 모비 딕에 붙여진 악명들은 현실이 되어 피쿼드 호와 선원들을 덮칩니다. 최후의 전투에서 결국 피쿼드 호는 에이해브 선장과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감상을 쓰면서 결말까지 적나라하게 밝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드물게 밝히는 경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 와 무관하거나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 정도입니다. 

 <모비 딕>은 둘 다에 해당되는데, 세계 문학에서도 소문난 '비극' 안에 <모비 딕>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도전할만한 일과 터무니없는 도전은 엄연히 다릅니다. 냉정하게 맞서도 이길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맹목적인 흥분 상태, 광란에 가까운 정신으로 도전한다는 건 자살행위일 뿐입니다. 

 모비 딕에게 팔이나 다리를 잃은 이는 에이해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항해에 나선 작은 아들과 그 아들을 찾아 배를 내린 큰 아들까지를 잃은 선장도 있었고, 몸 일부를 잃은 사람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복수보다는 생존을 선택합니다. 모비 딕의 터무니없는 강함과 교묘함, 영악함까지를 받아들이고, 바다의 신처럼 여겨 피해 다니기도 합니다. 에이해브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정말 에이해브 선장이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리 흔히 쓰는 말이 아님에도 '저주'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저는 "나는 너를 저주한다."는 말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그런데도 '저주'라는 말이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기이한 일이지만, 저주가 사람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주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요.


 에이해브 선장은 평화롭게 자기 삶을 살고 있던 모비 딕을 죽이려다가 다리를 잃습니다. 모비 딕은 정당방위로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그러다 다리를 잃자 에이해브는 저주를 퍼부우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결국 죽을 때와 자리를 찾아가듯 모비 딕과 다시 만난 바다에서 자신이 내렸던 저주는 이루어집니다. 둘 중 하나의 '죽음'으로요. 

 솔직히 아직도 에이해브 선장과 모비 딕의 대결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광기와 복수심으로 상대와 맞서는 건 자살행위일 뿐이다라는 게 그나마 얻은 교훈일 뿐이죠.


 지금도 포경선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닙니다. 압도적인 화력과 발달한 기술력으로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이 벌였던 치열한 대결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래는 발견되고, 학살당할 뿐이죠. 끔찍하게도 인간적인 일입니다. 인간의 경제 사정이야 어떻든 고래가 죽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만은 에이해브 선장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죠. 상관없는 얘기를 해버렸네요. 


 <모비 딕>이라는 작품이 단순이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만 이야기했다면 지금까지 읽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슈마엘과 식인종 퀴퀘그의 우정이나 선원들 간의 갈등, 동료 혹은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말이 통하지 않는 고래와의 소리 없는 대화. '죽음'이라는 소재를 빼놓는다면 <모비 딕>은 낭만적이고, 조금 과장해서 목가적인 풍경까지 보여줍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의 이동과 죽음은 장엄하고도 엄숙해서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죠.


 거대함.

<모비 딕>은 바다의 거대함이나 고래의 거대함 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운명의 거대한 흐름도 함께 보여줍니다. 곳곳에 심어진 복선이 때가 되면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듯 차례차례 존재를 드러내는 거죠. 그 완성이 침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을 에이해브에서 모비 딕으로 옮기면, 모비 딕은 인간의 무수한 도전에도 꺾이지 않는 거대한 자연의 의지를 상징하는지도 모릅니다. 결코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도전자의 의지는 물론 생명까지 꺾어버리는 단호함, 모비 딕은 그 강함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모비 딕에게 '저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주란 어딘가 치졸하고, 옹졸하며, 비겁한 데다 부자유스러우니까요. 


 모비 딕과의 대결을 읽다 보니 어느새 모비 딕을 응원하게 되더군요. 도전하는 인간을 응원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에이해브 선장이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운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피쿼드 호가 조금 더 빨랐거나 튼튼했다면 모비 딕이 패배하고 에이해브 선장이 승리했을까요.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모비 딕의 패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다의 신'인걸요.


 잠깐 이야기했지만 현대의 포경 기술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인 고래를 압도합니다. 날카로운 작살은 강력한 발사기를 떠나 고래의 심장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의 죽음이 인간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낭만적인 바다 위의 대결은 <모비 딕>에서 끝이 났고, 인간의 영원한 패배로 바다에 새겨져 있으니까요.


 이상한 얘기지만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 선원들의 광기 너머에는 낭만이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 십중팔구는 패배할 대결에 나서는 무모한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는 감수할 위험도, 필요한 용기도 잃어버린 이 시대입니다. 무모한 도전자들의 광기, 그 너머로 그리움이 보이는 듯 느껴지는 건 바다의 신기루를 오래 마주한 탓이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 길었던 나의 '여린 시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