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과 소음과 공명과 대선.
5월은 가정의 달.
어린 날들에 귀에 익은 이 말은 어른이 되어서는 얼마간의 강제력을 지니게 됐다.
평소에는 바쁜 일상을 핑계로 자꾸만 뒤로 미루던 명분도 이때 만큼은 힘을 잃는다.
대선으로 온 나라가 소란스럽다.
아니다.
대선 때문이라는 건 어쩌면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자리,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앉아 있는 이 카페만 해도 유세하는 소리도, 정치를 논하는 얘기도 없지만 몹시도 소란스러우니 말이다.
인간이 내는 소음이란 종종 끔찍스럽다.
악다구니치며 다투는 소리가 아니라고 해도, 저마다 자기 소리를 전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공간 안에 있으면,
제각각의 목소리들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공명이 귀가 아니라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거다.
아, 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들 밖에 있으므로, 이 소음들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뿐임을 안다.
자기 얘기에 열중하는 사람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서로 더 크게, 더 가까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대화가 소중하기에 같은 공간의 누군가의 고통이나 괴로움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타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
방해자들.
돌아가보면,
이런 생각들이 대선의 소란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선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지지를 호소하는 목소리들.
선거가 끝나고 승자가 결정되기까지 각 진영은 같은 하늘을 지고 살아갈 수 없을 원수라도 만난 듯 으르렁 거린다.
공약과 정책으로 경쟁하기보다 선악, 색깔, 이념의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이려는 아귀다툼의 현장이 펼쳐진다.
솔직히는 이 모든 생각들, 이야기들은 다만 에두른 말에 불과한 허튼 소리다.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라는 불평이었다.
너무 시끄럽다.
50여명의 보통 사람이 앉아 있는 공간, 그 가운데 절반은 혼자 있거나,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하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도 이토록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아니면 이런 걸 수도 있다.
내가 서른 명의 소란스러움도 견디지 못할만큼 참을성이 없다는 거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평하기보다 내 귀를 틀어막거나, 이 공간을 떠나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인 거다.
결국 이 생각들, 소란스러움을 불평하는 일들은 잉여로움에서 생겨난 사치의 하나일뿐인 게 된다.
이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급히 해야할 어떤 일들이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테니까.
지금 나는 자주 듣는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 뒤에 배경음처럼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온 몸으로 견디며(그렇다. 온몸으로 소리가 들려온다. 과장이 아니다.), 평소에는 즐기지 않는 청포도 주스를 마시고 있다(선물받았으니 맛있게 먹어주는 게 예의).
지금 주변에 가득한 건 무의미한 소음이다.
그야말로 타인의 신변잡기, 잔소리, 흥미위주의 이야기, 혹은 인생고민(정말?)일 수도 있지만 나와 무관한 건 매한가지다.
그러나,
대선은 무관하지 않다.
왜 이런 결론으로 돌아가느냐 하면, 오늘과 내일, 그러니까 5월 4일과 5일은 사전 투표일이고, 5월 9일은 대선 투표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제 버스 시간이 다 되어간다.
후후, 시간을 쓰는 건 이렇게 쉽다.
방법도 다양하다.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소란스러움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귀와 몸은 좀 아프고, 신경이 예민한 날에는 머리도 아프지만, 이 신비로운 소리의 고저, 장단의 변화를 지켜보는 건 제법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
버스 안은 고요하겠지.
이 순간들의 소란스러움을 보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결국 소음, 소란도 총량은 정해져있는 것이리라.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나리라.
그러니, 투표합시다.
소중한 권리 행사를 포기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