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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02. 2017

존경받는 기사는 무엇을 가졌는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담아 보낸 편지.

<기사의 편지>_부키

옛날이야기, 속담, 우화를 소설 속에 넣는다면 어떤 방법을 쓰는 게 좋을까?

인물로?

사건으로?

교훈으로?

물론, 인물로도, 사건으로도, 교훈으로도, 결론으로도 쓸 수 있겠다.


 사실 이 책을 산 건, 굿즈를 받기 위해서였다. 일정 금액 이상의 도서를 구입하면 굿즈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마땅한 책이 없어서 한 권 고른 게 <기사의 편지>였던 거다. 

 결과적으로 '연기파 배우' 에단 호크가 썼다는 <기사의 편지>는 '지금'의 내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유는 이미 너무 많은 책에서 보고, 듣고, 생각해온 이야기들을 아주 쉽게, 편안한 어조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앉은자리에서 2 시간도 안되어 읽었는데,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는 느낌이었다. 에단 호크가 아버지이고, 아이들에게 인생의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고는 싶은데,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치 기사인 아버지가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남기는 형식으로 적은 게 분명해 보였던 거다.


 독특한 건 미국인인 에단 호크가, 동양의 속담이나 가르침을 여러 차례 인용한다는 거다. 

예를 들면 '새옹지마'의 일화 같은 것 말이다.


 작가가 배우가 아니라 소설가였다면 '표절 논란'에 혹독하게 시달렸을 거라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그만큼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들이 유명하고 또 흔한 사례들이다. 

 아이러니 한 건 이런 거다.


앞서 '지금'의 내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감흥은 크지 않았지만 느끼는 바가 작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기사의 편지>를 통해 전하는 스무 가지 가르침을 모두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미덕들, 습관들이 바늘처럼 양심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감상을 적는 지금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는 거라고 한 공자의 말.

여기에 더하자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걸 행하는 경지에 닿아야만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에단 호크는 아이들을 위해 흔한 속담과 우화에 가르침을 담아 썼겠지만, 나처럼 머리로만 알고 행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전해줘야겠다. 아이에게 읽어주고, 함께 미덕을 실천해 나간다면 더 나은 삶을 위한 밑거름을 더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의미로 타락하기 전의 기사는 정의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물론 서양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일본으로 치면 무사, 조선을 생각하면 양반이 되겠다.

 이들이 받았던 존경과 경외는 그들이 짊어진 책임을 다하고, 올바르게 행동한 결과였다. 

'정의'라는 단어조차 그 가치가 무색해진 이 시대이기에 우리에게는 정의와 정직, 명예와 성실함이 간절한 게 아닐까.


 <기사의 편지>의 완성도는 높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에 비친 아이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름답다. 

명예를 걸고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기사도를 닮았달까. 

 한때는 기사라는 지위가 자연히 세습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노력하지 않으면, 스스로 기사의 미덕을 갖추지 않으면 저절로 누릴 수 있는 지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용기를 내자. 아직 갈 길이 멀고 또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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