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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03. 2017

죽음을 맞이하는 일, 죽음을 보내는 일.

하나의 존재는 세상을 두 번 흔든다.

<어느 개의 죽음>_장 그르니에/민음사

 세상은 언제 시작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 더, 세상은 언제 끝이 난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답할 수 있는 대답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눈치채셨나요?


제가 준비한 대답은 '나'입니다.

내가 태어난 순간 세상은 시작되고,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끝난다는 거죠.


 동의를 구하는 답이 아니기에 공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남겨진 가족, 사랑하는 이들까지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 넓게, 인류와 세계를 생각할 수도 있고요. 


 나 외의 누군가 혹은 세계를 위한 삶을 살고, 죽음을 맞는 게 더 위대하고,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듯, 내가 최우선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죠 뭐.


 중요한 건 모든 존재, 세상을 찾아온 하나하나의 존재라면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세상을 두 번 흔든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의 순간이고요.

 

<어느 개의 죽음>은 카뮈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장 그르니에가 반려견인 '타이오'를 보내던 시기의 마음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오래 함께 했기에, 아끼고 또 사랑했기에 장 그르니에는 몹시 괴로워합니다. 

 작가란 천형과 같아서 슬픔과 괴로움조차 기록하지 않으면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고통을 표출하고 해소하는 방법으로 쓰기도 하니,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 그르니에는 고통스러워하는 타이오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안락사'를 택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반문하게 되죠. 

 '안락사가 타이오를 위한 것인지 타이오를 지켜보는 자신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거죠. 

 마침내 타이오는 고통스럽게, 혹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장 그르니에는 이제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과거를, 함께했던 시간의 행복을 떠올립니다.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보다 죽음 이후에 돌아보는 일이 더 마음 편하다는 건 잔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삼켜지기 전까지는 살아있으므로 세상에 함께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죽어버리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고, 함께라고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홀가분해지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죠, 뭐.


 안락사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원하고, 바란 안락사, 그러니까 인간의 안락사는 동물의 안락사보다는 덜 잔혹합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했기에 누구를 원망한다거나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안락사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 인간은 평소에는 동물과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만큼은 동물이 인간처럼 빨리 괴로움을 '끝내 버리고 싶다'라고 생각할 거라 믿는 걸까요.

 

 동물은 동물 나름의 삶을 마치는 방식이 있을 텐데, 그 순리를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감히 마지막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 건 무슨 근거에서 일까요. 

 동물에게도 사후 세계가 있어서, 마지막 고통의 시간 동안 영혼을 달래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어찌 인간이 알 수 있을까요. 이제 막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데, 오지랖 넓은 인간이 고통을 줄여주겠다고 죽여버린다면, 준비할 시간을 빼앗긴 동물은 얼마나 당황하게 될까요. 


 회생의 가능성이 없다는 건 명백합니다. 늙고 병들어 찾아든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 인간다운 마지막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괴로움은 '나',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입니다. 나의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해, '호의'를 가장한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또 삐딱하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존재의 마음을. 같은 인간끼리도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을 감히 안다고, 확신하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는 죽음에 제법 덤덤한 편이라고 믿지만 그럼에도 저보다 수명이 확실히 짧은 생명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겁이 많기도 하고, 귀찮아하는 일도 많아서 번번이 자책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안락사를 오만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사실은 죽음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비겁한 마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보통은 틀린 선택을 하고 자주 후회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기에 앞으로도 다른 존재의 생과 사를 정하는 인간의 판단과 행위는 오만이라고 계속 생각할 겁니다.

 

 이런 글의 끝에 적을 말은 아니지만 유언을 남긴다면 이렇게 적을 겁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 놓인다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순리에 맞춰 세상에 왔듯, 순리에 따라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링거를 놓는 일도, 호흡기를 채우는 일도 없이, 이 몸에 남은 기력이 더는 생명을 붙들 수 없게 됐을 때 꺼질 수 있도록,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타이오는 참 행복한 개다.

죽음 이후에도 제법 오래 기억될 테고, 기억되는 동안 여전히 사랑받을 것이므로.


이야기 마지막에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어떤 개의 죽음> 중


아, 역시.

사랑해야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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