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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03. 2017

살아야 한다, 사랑하며.

나와 삶과 시간과 당신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를 좋아한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다만 모든 걸 걸고 자기 삶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에서 느끼고 깨닫는 바가 적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누구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에게 요구하기를,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 '삶으로 자신을 증명하라'고 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러한 세상의 요구는 나를 어지럽게 한다. 늘 혼란스럽고, 때때로 겁이 나기도 한다.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나는 스스로 배우기 시작한다. 나를 알게 되는 날까지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되는 길고 긴 배움의 시간이다.


 <자기 앞의 생>의 화자 '나', 모하메드 또는 모모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모모는 질문하고, 해석하고, 스스로 배우는 데 능숙하다. 나이는 열한 살이거나 어쩌면 열네 살인지도 모른다. 아랍인이지만 유대인일 수도 있다. 엄마는 살아있거나 죽었을 수 있으며, 아빠는 미치광이거나 살인자일 수도 있다. 

 모모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본다. 몸을 팔고, 약을 하는 이들과 함께 지낸다. 일찍 철이 든 아이, 나이보다 조숙한 모모는 삶을 찾으러 다닌다. '진짜 나'를 알기 위해 고민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기 삶을,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생은 주어지지 않으므로.


 모모에게는 '아르튀르'라는 친구가 있다. 아르튀르는 옷을 입힌 우산이다. 오직 모모와 함께인 시간 동안만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다르게 적으면 아르튀르에게는 모모가 전부이자 모든 것이다. 모모가 없으면 아르튀르도 없다. 그냥 우산이, 옷 쪼가리로 감싸인 이상한 우산이 되어 버려진 듯 뒹굴어 다닐 뿐이다. 

 모모와 함께 있을 때 아르튀르는 최고의 멋쟁이가 되고, 광대도 되고, 예술가도 된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가 '존재'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야말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아닐까. 

 모모는 아르튀르를 사랑한다. 아르튀르도 틀림없이 같은 마음일 거다.


 이야기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모모는 자라고, 누군가는 나이 들어간다. 

 시간은 나이를 주고, 젊음과 건강, 때로는 삶 전부를 가져가 버린다. 친하게 지내야겠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존재하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해본 적도 없다. 나는 시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시간은 높은 자리, 혹은 허공에 떠있는 게 아니다. 날아가거나 흘러가지도 않는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시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존재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시간에는 존재 이유가 없다. 

 시간은 '그저 있을 뿐'이다. 이유도, 의미도 없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의 일이다. 시간이 더디거나 빨리 흐르는 이유는 그래서다.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에, 같은 시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동일하게 떠오른 태양을 이고,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초침 사이에서 동상이몽처럼 다른 시간을 살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을 노래하는 마음도 알만 하다. 


<자기 앞의 생>은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사랑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나가겠다는 다짐이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인 '나'를 사랑하고, 나를 향한 세상과 사람들의 호의와 선량한 마음을 사랑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일 없이 사랑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이름을 빌려 <자기 앞의 생>에서 '생'을 이야기한다. 여러 차례, 다른 표현으로.

하나를 소개한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앞의 생> 중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저마다의 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작하며 적었듯 세상은 '자신을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 자기를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한다. 

오랜 고민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살아간다'는 건 그저 '살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의미를 찾고, 구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삶이 주어지는 거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운'도 필요하다. '주어진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럼에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좌절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로맹 가리를 알아갈수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맹 가리가 살아온 삶과 살고자 했던 삶이 그리 닮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다시 처음부터 들여다봐야겠다.

좋은 작품을 읽는 기쁨을 만끽하며. 즐거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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