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Jun 20. 2017

개성과 인격의 말살과 자유의 상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와 만나다

우리들_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마찐

감상문 쓰기를 멈춘 지 16일째인 오늘, 새삼스레 '어떻게 쓰는 거더라?'하는 당황 섞인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아, 읽기든 쓰기든 꾸준히 계속하는 게 중요함을 다시 깨닫는다. 


 한 시간 넘게 방황을 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쓰기 시작한다. 

흐려진 기억을 더듬으며, 잊어버린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작.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중요한 걸 만들고 싶지 않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고 또 명료하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무의미하므로.


이런 나이기에 자먀찐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옥의 풍경처럼 들이닥쳤다.

개인보다 전체가, 자유보다 하나가 더 중요한 세계. 

저마다 개성을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던 과거를 미개하다 말하는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대는 지금, 21세기로부터 적어도 천 년 이후다. 200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세계 인구의 10분의 2만이 살아남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부와 격리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현재의 세계,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게 된다. 

 『우리들』의 세계는 자유도 소유도 사랑도 없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세계와 무척 닮아있다. 시기 상으로는 올더스 헉슬리보다 자먀찐이 더 앞서 있기에, 자먀찐의 세계관에 올더스 헉슬리가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겠다. 

 디스토피아 소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지 오웰의 <1984>. 성적 쾌락이 제한된 <1984>와 달리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쾌락이 권장된다.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과 방법, 장소가 제한되어 있고, 반드시 신청을 거쳐야만 한다. 질투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나' 혹은 '개인'이 아닌 '우리'이기에 우리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될 수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건 미개하고, 야만적인 일이기에 통제받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없다.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다만 D-503이라는 숫자가 있을 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역시 아무 의미도 없는 편이 이 소설에 더 어울린다. 의미를 부여한 순간 개성이 생겨버릴 테니.

 D-503은 우주선 '인쩨그랄호'를 설계하는 수학자다. 이 세계에 아무런 불만도, 위화감도 없이 하루하루 생활과 일에 만족하며 자부심까지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 위기가 닥쳐온다.  남자의 인생이 위기 혹은 변화를 맞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조금 식상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D-503도 그랬다. I-330이라는 여자가 그의 인생에 뛰어들면서 만족도, 평화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D-503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개성도, 자유도 없는 세계에서 변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하다면 읽어보기를.


『우리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1984>나 <멋진 신세계>보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 가까이 일찍 발표된 작품이다. 1920년에 완성됐지만 러시아에서 발표되지 못하고, 영역본으로 출간되어야 했던 불운을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줬다고 하는데, 『우리들』에 나오는 '은혜로운 분'과 '보안 요원'들은 <1984> 속 빅브라더와 사상 경찰을 떠올리게 한다. 


100여 년 전에 완성된 소설에 공감하게 되는 건 '개인의 소멸은 미래 이야기일까?'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사소함에서 위대함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길은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을 잊고 1톤의 백만 분의 1 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중

1그램은 백만 분의 1톤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1톤은 백만 개의 1그램이 더해진 결과다. 이건 1+1=2라는 결과와 다름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1그램은 1그램이 아니다.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은 잊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램이 아니라 백만분의 1톤이기에. 

 이중사고를 아는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있으리라.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우리가 '나'가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나'가 모여 '우리'가 된 후에는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거다. 결국 남는 건 '우리'가 된다. '나'는 있으나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전체주의 사상과 함께 눈에 띄는 건 '기계'의 등장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우리들』중

인공지능과 기계 발전이 인간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지금에 더 크게 와 닿을 문장이다. 적어도 현재,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같은 '기계'와 '기계'같은 '인간'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도 온라인 상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미래에,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게 불가능할 건 뭔가?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음'을 뜻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존재할 수 없는 게 된다. 전제가 되는 유토피아가 없이 전제에서 확장된 디스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미리 절망하지는 말기를.

 <유토피아>를 언급했으니 좀 더 이야기하자면, 유토피아를 읽으며 가장 의아했던 존재가 바로 '노예'였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게 생기지 않는 법이다. 누구도 가축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며, 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데 어떻게 먹을 게 생길 수 있겠는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모를까.

 유토피아에도 범죄자와 포로는 존재한다. 그들은 벌로써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차별 없이, 모두가 천국에서의 생활을 하는 건 적어도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것보다는 다 비슷비슷할 때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만족이 적어진다. 


 결국 1920년에 완성된 『우리들』이 러시아에서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세계를 전복하려는 혁명 세력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야기는 권력자들이 좋아할 이야기가 못됐던 거다. 특히 혁명으로 세계를 막 전복시킨 권력자들이라면 더욱더 경계했을 게 분명하다. 


개성과 인격을 스스로 말살시키고, 자유로 내팽개치고 전체, '우리'의 삶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시대. 

언젠가 그런 시대가 정말 찾아올까. 

은연중에 강요되고 추종되는 단 하나의 진리, 단 한 사람의 위대한 존재. 

그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세계가 정말 열릴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다. 

우리들 같은 건, 나 다음의 문제일 뿐.

오래간만에 감상문을 적었더니 정말 터무니없는 횡설수설만 늘어놓고 말았다.

이래서 꾸준히 적어나가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란 걸 새삼 깨닫는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우리들』.

감상은 여기까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야 한다, 사랑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