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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21. 2017

물론, 호두껍질 얘기는 아니다.

햄릿의 가장 파격적인 재해석 <넛셸>

<넛셸>_이언 매큐언/문학동네

삼촌과 어머니의 근친상간.

형제 살해.

남편 살해.

그 모든 공모와 과정, 결말까지를 지켜보는 무력한 아들.

『넛셸』은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의 발단, 진행, 결말까지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과 닮아 있습니다.

 작가 이언 매큐언의 생각, 출판사의 의지가 어떻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이기에  이 소설이『햄릿』을 재해석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읽은 이, 독자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땅콩 아니, 호두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호두는 영양가 높은 견과류의 하나죠. 뇌와 닮은 알맹이 모양이 불쾌할 법도 한데 두뇌 발달에 좋은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결과로 오히려 그렇게 생길만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호두는 나무에서 열립니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서 수정이 된 결과 호두 열매가 맺히죠. 처음 열린 열매에서 적당한 숫자가 떨어지고 남은 열매만이 영글어 호두가 됩니다.

이런 거야 뭐, 다 아는 얘기죠.


 호두나무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보기에 호두나무는 의지도 없고, 사고도 불가능하기에 큰 차이가 생겨납니다. 『넛셸』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정도만 적어보기로 합니다.


 첫째, 호두나무는 개개의 호두 열매를 걱정하거나 마음 쏟지 않습니다. 수정이 안 되면 썩고,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떨어지죠. 마지막까지 나무에 붙어 있었다 해도 다람쥐 같은 천적을 막지는 못합니다. 결국 정말 많은 열매 중에 일부만이 영근 호두가 되고, 그중 극히 일부만이 뿌리를 내려 호두나무가 됩니다.

 호두나무에게는 모정이란 게 없습니다. 뿌리내리고 열매 맺기를 매해 거듭할 뿐이죠.

 어머니는 다릅니다(모든 어머니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지만). 자기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느끼고, 염려하며, 생각하고 마음을 씁니다. 약물이나 담배, 알코올을 자제하고, 나쁜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것도 피하죠.

 어머니는 아이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줍니다. 그 차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호두의 껍질입니다. 호두는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아는 무르고 연약한 상태로 자라고, 태어나죠. 그 차이를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생물학의 특성이겠지만, 존재 본질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째, 호두나무에 열린 호두 열매는 발생부터 영글 때까지 전적으로 무기력합니다. 양분이 적게 올라온다고 투덜댈 수 없고, 위치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움직일 수도 없으며, 호두나무에게 자기 존재를 인식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와 바람의 위협에 스스로 맞서고 지켜야 하며, 보호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죠.

 호두 열매에게는 애착이란 게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 영글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죠.

 태아는 다릅니다. 일정 단계 이상으로 발달하면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태동이라는 방법으로요. 어머니의 언행, 즐겨 듣는 음악, 좋아하는 음식에 반응함으로써 어머니의 행동, 습관, 취향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입덧이라는 방법이죠.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에서 인간과 호두나무 사이에 차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에 마음을 쏟지 않듯 어머니가 태아에게 마음을 쏟지 않고, 호두 열매가 호두나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듯 태아의 모든 의지가 묵살되고 거부된다면요?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단순한 장해물, 방해꾼, 귀찮은 짐덩어리가 된다면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바로 『넛셸』이야기가요.


 시작하며 적었듯 이야기는 제법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만삭에 가까운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생, 태아의 삼촌과 불륜을 맺고 있습니다. 태아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클수록 어머니는 아버지를 역겨워하고 보기 싫어하죠. 어머니가 사랑 대신 선택한 건 삼촌과의 욕망과 쾌락입니다. 만삭이 가까워진 시기에 섹스를 피하거나 조심해야 함에도 격렬한 관계를 계속 갖죠.

 이쯤에서 이름을 밝히자면, 어머니의 이름은 트루디, 아버지는 존 케언크로스, 삼촌은 클로드입니다.

이야기는 아버지, 존 케언크로스 살해 모의로 시작합니다. 어머니 트루디가 가담하고, 어쩔 수 없이 태아인 '나'까지 휩쓸린 살인 계획으로. 투루디는 얼마간 망설이는 듯 보이지만 마음을 굳힌 뒤로는 뱃속의 태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를 생각하지 않듯이.

 태아가 호두 열매 취급을 받게 되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집니다. 고작 이런 게 가능할 뿐이죠.


생각해보라. 태아가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뿐이고, 성장도 의식적인 행위라고 하긴 어렵다. 순수한 존재의 기쁨, 별다르지 않은 나날의 지루함. 연장된 희열은 곧 실존적 권태다. 여기 갇힌 시간이 감옥살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여기서 고독의 특권과 사치를 누려야 한다.
『넛셸』중

태아는 양막에 싸여 가죽 한 장에 불과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벽 속에 갇혀서 단지 영양을 공급받으며 타의에 의해 성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엔 기쁨도, 희망도, 미래도 없죠.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실존의 권태에 시달려야 하는 절망. 그 절망 속에서 홀로 떨어야만 하는 겁니다.

 호두 열매는 영글어 땅에 떨어진 다음, 싹을 틔울 때 비로소 단단한 껍질을 벗습니다.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호두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갇힌 세계에서 생명으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서야, 세상에 태어나서야 완전한 생명으로, 존재로 인정받게 됩니다.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알이 깨어져야 새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호두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호두 열매가 싹을 틔우고, 태아가 태어난 다음의 이야기를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햄릿』이야기를 조금 할까 했는데, 그전에 '사고하고 고뇌하는 태아의 존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넛셸』을 함께 읽을 독서 모임 회원 한 분은 이 이야기의 배경, 화자가 뱃속의 태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낙태에 반대하는 모양이다."라고요.

 정말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 뱃속의 태아가 사고하고 고뇌하며 고통과 권태를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존재와 권리는 인정받고 보호되어 마땅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뤄뒀던 『햄릿』얘기를 조금 하고 감상을 마치기로 하죠.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는 아버지인 살해된 왕이 유령으로 나타나 햄릿에게 진실을 일깨웁니다. 햄릿은 고뇌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죠. 그 실행의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의 비극입니다.

 햄릿이 복수를 포기했거나, 절망과 치욕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겁니다. 작가의 펜 앞에서 햄릿은 호두 열매처럼 무력했겠지만요.


『햄릿』을 모른다고 해도 『넛셸』을 읽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흔히 뉴스를 통해 접하는 비정한 살인 사건과 의 전말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딱 하나, 뱃속의 태아가 그 사건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요. 하지만 『햄릿』을 안다면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숨겨둔 장치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왜 이 이야기의 제목이 『넛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알게 될 수도 있고, 영영 모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 앞에서 호두 열매처럼 무력하니까요.

언젠가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벗고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때는 조금 더 고민해봐도 좋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님에 조금은 안도하고 감사하며,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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