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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22. 2017

나는 어떤 뚜껑을 열어둔 채 닫지 않았던 걸까.

바나나는 어디서나 바나나니까 요시모토 바나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운 책 읽는 애'가 되어있는 걸 깨달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참 당황스럽습니다.

정말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많은데 어찌 내가.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랑해 보이는 책도 읽습니다 하고 말이나 꺼내보려고요. 물론, 농담입니다.


여름 하면 바다, 해변, 파도를 떠올리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늘어놓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여름이라고 바다로, 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바다를 떠오르게 하는 추억,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네, 가난한 추억, 빈곤한 과거의 폐해라는 건 보통 이런 식입니다. 

그리워하는 일도, 애착을 보이는 일도, 떠나는 핑계도 만들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지금 이 자리에 머물게 되는 거죠.


 '바나나'가 만국 공통, 어디를 가도 바나나라서 이름을 '요시모토 바나나'라고 했다는 그. 

『바다의 뚜껑』은 바로 그 요시모토 바나나의 여름,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있었던 결정적인 만남. 

이해와 그리움을 잔잔하게 그려 담은 이야기입니다.


 성공을 위해 경쟁하고 몸부림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마리는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면 남쪽 섬에서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남쪽 섬으로 여행을 가죠. 보면 볼수록 남쪽 섬은 마리의 마음에 쏙 들어맞았습니다. 빙수를 유난히 좋아해서 맛있다고 소문난 집은 일부러 찾아다니는 빙수 헌터 마리는 남쪽 섬의 빙수집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연이라고 할지, 운명이라고 할지, 그 빙수집 덕분에 마리는 결심을 바꿔서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빙수집을 차리기로 합니다. 

 엉뚱한 생각이라고 혼날 만도 한데, 부모님은 그런 마리를 반깁니다. 마리는 차근차근 빙수집을 열 준비를 하고 도시의 화려한 빙수가 아니라 수수하고 단출한 빙수를 팔기 시작하죠. 이야기는 마리의 집에 하지메가 머물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메는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얼굴 한쪽에 화상이 있습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하지메를 구했던 사람이 바로 하지메의 할머니였죠. 그렇게 하지메를 아끼고, 염려하던 할머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 친척들은 서로 할머니의 재산을 더 얻기 위해 하지메의 가족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메는 요양을 겸한 도망, 도피처로 마리의 집을 택했던 거죠. 

 처음에 마리는 하지메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하며 거리를 살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메의 선함과 순수함을 깨닫게 되고, 다른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이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생기는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한 계절, 그 이상은 필요 없었습니다. 

 무한의 경쟁, 서로 더 갖기 위해 벌이는 악다구니 속에서 너무나 평화롭고 아늑한 세계를 만들어 낸 두 사람의 모습.

 한 여름의 햇살과 바다, 쇠락해가는 바닷가 마을의 한 구석을 차지한 수수한 빙수집. 그 안에서 피어나는 우정.   

『바다의 뚜껑』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바다의 뚜껑』은 '참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고향이 있고, 고향에 집이 있고,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빚에 쫓긴다거나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적당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걸 살리고 싶지도 않은, 참 느긋하고 여유로운 자의 달콤한 사치로 읽을 수도 있다는 거죠. 


지나친 생각일까요? 

그랬다면 다행입니다만.


 한편으로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야기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상처와 갈등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어린 여자 아이가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화상을 지닌 채 성장하는 일이란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시선과 두려움 혹은 혐오로 거리를 두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생존 투쟁을 쉬지 못하는 괴로움이었을 겁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 화재에서 자신을 구해준 할머니만이 편견도 연민도 없이 오롯한 사랑으로 지켜주었던 거죠. 

 시간은 유일한 존재인 할머니를 삶의 저편으로 데리고 갑니다. 뒤이어 찾아온 건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풀리는 재산다툼이었죠.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잃은 슬픔과 추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욕심과 갈등이 뿜어내는 악의를 한꺼번에 감당하기에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그래서 도망치듯 떠나왔던 거죠.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빙수집을 열겠다고 한 마리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소박한 꿈을 이루었음에 만족한다고 해도 안심하기 어려웠겠죠. 


마리와 하지메는 파도와 해변처럼 서로가 서로를 허락하고, 품어줍니다. 그렇게 서로의 불안과 상처를 치유해 나가죠. 


특히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 있어 소개합니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바다의 뚜껑』 중


인간은 존재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걸 파괴합니다. 환경, 자연이거나, 물건이거나, 때로는 사람의 몸과 마음까지도 부숴버리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는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고 애쓰는 인간은 무언가, 세상에 없던 어떤 걸 만들어냅니다. 

신의 영역이라는 '창조'. 신을 닮았다는 인간에게 허락된 무엇보다 대단한 능력이 바로 창조의 능력이겠죠.


 이 힘에 어울리는 말은 '엄청난 힘'외에는 없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엄청나서 오히려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힘. 어느 순간 불쑥 깨어나 자기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의지.


 엄청난 힘이니 의지니 하고 적고 보니 내게도 그런 게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그 힘이 솟아나는 단지의 뚜껑을 열어놓고는 닫는 걸 깜빡해서 이제는 다 흘러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닐지.

최근 부쩍 심해져서 풀리지 않게 된 피로와 때 이른 건강의 염려,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기분과 포기해 버리려는 의지박약. 


'엄청난 힘'을 이야기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나약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인 '바다의 뚜껑'이 어떤 의미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마무리짓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 그만둔 무엇인지, 열어둔 채 닫지 않아 그 안의 무엇이 다 흘어져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계절이 끝나간다는 이야기인지 말이죠.


뭐,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

마리와 하지메의 우정이 너무나 아름답고, 둘의 이해와 적절한 거리가 또한 아름답고, 다시 만나는 날 활짝 웃을 두 사람의 표정도 아름다울 텐데요.


 올해 여름에는 바다에 들러봐야겠습니다.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한 빙수집을 알고 계신다면 가만히 가르쳐 주셔도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론, 호두껍질 얘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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