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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23. 2017

적어도, 사랑과 희망에는 이유가 없다.

희망의 유혹은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_로맹 가리/문학동네

안데스 산맥 너머의 땅, 세계의 끝 페루.

이 세상의 끝에는 매일 밤마다 새들이 날아와 죽는 해변이 있습니다. 이곳 해변에는 죽은 새들만 사는 게 아닙니다. 

마흔일곱의 자크 레니에도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영웅으로, 전쟁 이후에는 성공한 외교관으로 세계를 날아다닌 남자. 

사랑에 모든 걸 걸었지만 끝내 환멸만이 남아 그를 세상 끝으로 몰아넣었던 거죠.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 통로마저 닫고 지내던 그는 우연히 사육제 다음 날 새벽 바다에 뛰어들려는 여자를 구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이 생의 마지막 파도, 삶을 끝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마지막 파도가 덮쳐오기 전에 여자를 바다에서 끌어낸 거죠.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포함해 열여섯 편의 단편을 담고 있습니다. 

열여섯 편의 단편에서 로맹 가리는 인간 존재와 고독, 삶의 의미, 사랑, 믿음과 신뢰, 굴종, 예술혼과 이념의 투쟁, 전락과 몰락, 소통과 착각, 오해와 이해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편애하는 작가다 보니 어떤 작품이 좋았다거나 좋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굳이 꼽으라고 하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벽>을 택하겠습니다. 

 로맹 가리 장편을 몇 편 더 읽고 난 후에 다시 읽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특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로맹 가리가 작품을 통해 언급했던 '생태주의 시각'이 어떤 건지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었죠. 

예를 들면, 페루의 해변에 날아와 죽는 새들은 생의 증거로 조분석을 남깁니다. 새 한 마리가 평생에 걸쳐 남긴 조분석은 인간 한 가족을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로맹 가리는 말합니다. 새 한 마리의 삶이 한 가족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증거 된다고 볼 수 있겠죠. 

 꼭 비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로맹 가리는 인간의 경우도 이야기합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내는 조분석으로 같은 기간 동안 사람의 일가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수지맞는 사업이다. 그렇게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새들은 이곳에 와서 죽는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임무는 시에라 마드레 산에서 카스트로와 함께였다. 고상한 영혼 하나가 이상주의에 헌신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한 나라의 경찰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법. 조금 시적으로 해석한 것뿐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고상한 영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는 자크 레니에의 '이상주의에 헌신'은 '한 나라의 경찰'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가족, 인간이 아니라 굳이 '경찰'이라고 말한 이유는 희생의 결과 생겨난 혜택이 인간 전체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일부 권력'을 위해 쓰인다고 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가마우지 한 마리의 평생'을 '수지맞는 사업'이라고 평한 데에도 냉소가 섞여 있겠지만 보통의 영혼도 아니고 '고상한 영혼'이 헌신한 결과가 권력을 배 불리고 특권을 살찌우는 데 기여할 뿐이라면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로맹 가리는 인간의 죽음의 순간, 영혼이 승천하는 순간의 엄청난 에너지도 이야기합니다. 이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다면, 자연을 더럽히거나 파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물론 영혼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조차 논쟁 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영혼이 승천할 때의 에너지를 끌어 모은다는 생각은 허황된 상상 혹은 망상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만으로도 유쾌함을 느꼈습니다. 핵 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 인간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계속되는 동안, 다르게 말하면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고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무한정의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역사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현실적인 인간이기에 영혼 에너지를 모으고 활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트릭스>의 세계라면 유사한 풍경이 펼쳐지겠지만, 그런 현실은 더더욱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벽>은 다른 소설과 비교해서 유난히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깃거리를 찾는 작가에게 의사가 전해주는 어느 연말의 경험담이죠. 짧은 이야기에서 두 사람이 죽음을 맞습니다. 한 사람은 몹시 아름다운 처녀고, 다른 사람은 청년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가난하다는 게 하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게 둘이며, 스무 살 남짓되는 나이가 셋입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이웃이기도 하죠.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몹시 힘겨운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가난을 비관하며 애정을 갈구하고 고독에 떨던 청년이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의사는 그 청년의 사망을 진단하기 위해 방문하죠. 청년의 책상에는 유서가 남아 있었습니다. 유서에 적힌 이유는 외로움 고독에 더해 옆 방에서 들리는 처녀의 '신음 소리'였습니다. 자신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극히 얇은 벽을 사이에 둔 공간에서 쾌락에 들떠 신음 소리를 흘리는 처녀를 참아낼 수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 얇았던 그 벽 하나를 극복하지 못한 비극적인 반전이요. 어떤 반전인지 궁금하신 분은 정말 짧으니 서점에 들르거나 도서관을 찾았을 때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벽>에서 느낀 건, 오해와 몰이해였습니다. 인간에게 나의 괴로움과 고통은 타인의 괴로움과 고통보다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고작 그 정도로?'라거나 '네가 뭘 안다고?'하는 식의 말도 서슴 없이 내뱉을 수 있죠. 나는 타인의 고통도 괴로움도 알지 못하니까요. 로맹 가리는 그런 인간의 오류, 착각, 자기 중심주의, 비극을 자처하는 성향을 적나라하게 풀어놓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늘어놓을까, 이야깃거리가 궁하면 본문 어디라도 발췌해 말을 붙여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만두기로 합니다. 

짧은 이야기들인데, 구구절절이 이야기의 선후와 결말을 밝히고, 이렇게 생각한다거나 저렇게 느꼈다고 말하는 일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동한다면 붙들고 읽기 시작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잊어버려도 무관한 이야기인걸요.


흥미로운 점 하나를 더 이야기하고 마치기로 합니다.

로맹 가리가 어떤 의미로 적은 건지 알지 못하지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죽는다'거나 '죽었다'거나 '죽어간다'가 아니라 '죽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죽다'라는 표현은 '사건의 확정', '불가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명백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새들은 밤마다 페루에 가서 죽습니다. 새들이 죽는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다'라고 자꾸만 되뇌기도 합니다. 그 되뇜이 작가인 로맹 가리의 것인지, 자크 레니에의 것인지,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유는 있을 거라고요.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말장난 같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기에 살고 있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은 왜 죽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어쩐지 '왜 사는가?'보다 이유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 왜 죽었나요?"

1. 병으로요.

2. 사고로요.

3. 나이 들어서요.

4. 스스로요.

5. 등등.


 무슨 말이냐 하면요.

죽음은 삶보다 더 확정적인 상태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죽음 이후에 어떤 가능성도 남기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남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삶은 살아가는 동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죠. 

로맹 가리가 이야기마다 단순히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단순히 사는 것보다 사랑하며 살 때, 인간의 가능성은 더 확장되고 확대될 테니까요.

인간은 창조보다 파괴에 더 특별한 재능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기도 하죠. 유일하게,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파괴와 거리를 두는 인간의 특성은 '사랑'일 겁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 말이죠.


 한 마리의 가마우지, 하나의 고상한 영혼, 그보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대단히 낭만적인 상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랑은 이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 일지도 모르고요. 

세상 가장 현명한 존재라고 하는 인간이지만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 많은 새들이 페루에서 죽는지, 아주 얇은 벽 너머의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일 혹은 바로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사실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거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하고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속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비극적이며, 차갑거나 허무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도 발견할 수 있죠. 


 제법 길게 끄적였지만, 솔직히 저 역시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랬으면 좋겠다거나, 그렇게 해야겠다 하고 조용히 마음먹을 뿐이죠.  


 이대로 끝을 내자니 조금은 허전합니다. 그래서 남깁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속 한 문장을.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중.

 

굳이 극복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희망의 유혹은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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