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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03. 2017

눈물 나는 말, '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진주는 진주의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핑거스미스_세라 워터스>

 가끔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려고 시도하곤 한다.

내가 속한 세상,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

혹은 이렇게도.

나를 아는 사람들의 세상,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세상.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무언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좁아지고,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희박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곤 하는 거다.

 인간의 무르고, 연약한 특성만은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 나약해지고는 하는 내게는 언제나 약간의 '내 편'이 필요하다. 나를 편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우리'에 속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공통의 감정과 정서, 욕망과 희망 따위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제는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로 한다. 그런 이들이 세상에 없다면, 없더라도 괜찮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그 방법이 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짓고, 누군가는 그가 지은 이야기를 읽어 나갈 테니.


오늘의 이분법은 이런 걸로 정했다.

잃어버리지 않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과 잃어버렸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


겉으로 보기에 이 두 세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거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이분하고 삼분하고 사분해서 조각조각으로 나누고 흩으려고 해도 세상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일 테니.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을 너무나 다르게 느끼고, 실감하며, 꿈꾸고, 살아낸다. 

 『핑거스미스』는 그런 이야기다. 같은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가면서 고통은 닮아 있는 비참하고 쓸쓸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아니고는 누구도 아름다운 줄 모르는, 사랑 이야기다.


도시의 하천은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으면서 조금만 비가 많이 오면 금세 불어나서 거칠게 군다. 내가 사는 곳 가까운 데를 흐르는 하천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오늘처럼 비가 오면 하천 쪽에서 사이렌이 울린다. 

 '애애애애앵'하고 오래된 전쟁 영화 속 공습경보가 울리 듯한 소리로 처음에는 한 시간쯤 간격을 두다 30분이 되고 10분이 된다. 

 사이렌 소리가 일깨우는 건 두 가지다. 비가 온다는 사실과 물이 불어 났다는 사실.

 비가 오는 건 알아도 물이 불어난 건 잊고 있었을 내게 혹은 물이 불어난 건 보고 있어도 비가 내리는 건 잊고 있었을 누군가에게 사이렌은 단 한 번의 소리로 두 가지를 일깨우는 거다. 


 『핑거스미스』감상을 쓰면서 이분법이니, 사이렌이니 하는 얘기나 늘어놓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물론 이유는 논리보다는 주관과 감상에 치우쳐있으므로 납득이나 이해를 구할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감상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 그 하나로 적어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 『핑거 스미스』라는 말을 아직은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들었다. 영화를 보려는 생각도 마음도 있었다. 좋은 영화였다는 평에 보지 못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그런 아쉬움이 안도로 다가왔다. 이미지나 인물에 선입견을 갖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떠올리고 그리는 모습 그대로 수와 모드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음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열일곱 두 소녀의 운명적인 끌림과 사랑 이야기다. 마치 사이렌이 비와 물의 존재를 모두 일깨우듯, 수는 모드를 떠올리게 하고, 모드는 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사이렌 소리를 들었을 때 이 소설의 감상에 집 근처를 흐르는 하천과 거기서 울리는 사이렌 이야기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이렌에 대해 더 적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이분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적어도 불어난 물이나 내리는 비처럼, 지금 당장 나를 빠뜨리거나, 적시지 못하는 먼 이야기가 아니므로. 

 하나는 잃어버리지 않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잃어버렸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소중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기억하든 잊어버리든, 스스로 선택했든 선택할 수밖에 없었든 상관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테니 하나의 예를 들어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적당한 예로 뭐가 좋을까?

시간.

세상에서 가장 늙은 것인 시간으로 해야겠다.


시간이 흐르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도, 거스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시간을 부정한다.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다시금 시간과 돈을 들여 시간을 잃어버리기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회복됐다고,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자신과 세상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부정하고 또 부정하면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어떤 사람은 조용하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고통스러워 하기보다 지금을 살아가는 데 힘을 쏟는다. 괴롭지 않다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립지 않고, 아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알기에 그렇게 한다. 


아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다 보니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어쩌면 정반대 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렸다고 믿는 사람들이야 말로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부정하고 부정해서 잃어버리지 않은 듯 살아간다.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옛날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오히려 잃어버렸으므로, 잃어버렸기에 잃어버리지 않은 듯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거다. 그런 것 아닐까.


잃어버리지 않은 듯 살아가는 이들은 지나간 시간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지금의 삶에 들어 있다고 믿는 게 아닐까. 마치 요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고, 얻듯 지나간 시간을 주고 지금을 얻은 것이라 믿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핑거스미스』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

수와 모드, 두 소녀는 서로 잃어버린 것이 닮아 있다. 아버지의 존재는 나오지도 않고, 어머니는 모두 잃어버렸다. 더욱이 두 소녀는 현재, 지금도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다. 안심하고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단서, 이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세상 유일한 보호자들은 강압적이거나 자기 존재의 위력을 잘 아는 이들이다. 두 소녀 모두 그들의 보호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호자에게서 자유로워지다니, 말도 안 된다. 보호자는 말 그대로 보호하는 사람인데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국 그들, 보호자들은 착취자요, 감시자요, 지배자다. 

 꿈도, 사랑도, 애정도, 온기도 없다. 그 모든 건 허락되지 않는다. 방법, 방법이 없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딱 하나는 있다. 훔치는 거다. 그들에게서 훔쳐내는 거다. 그리고 달아나는 거다. 

『핑거스미스』에서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의미하는 버러의 은어'라고 적혀 있다. 

도둑들, 이 짧지 않은 이야기는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허락될 수 없는, 처음부터 빼앗긴 사랑을 되찾는 애처롭고도 안쓰러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두 도둑의 이야기다.


『핑거스미스』를 읽으며 처음으로 메모한 문장은 이거였다.

'단 한 번도 온전한 자기로 사랑받은 적 없는 두 아이'

밝혀지는 진실은 두 소녀가 처음부터 '나'로 '진짜 나'로 존재한 적이 없었음을 일깨웠다. 엇갈려버린 존재의 운명 탓에 단 한순간도, 거짓의 사랑조차도 받을 수 없었다. 17년이 삶 전체가 송두리째 가짜가 되어 부정당하기도 한다. 그런 충격을, 어떻게 간단히 견뎌낼 수 있을까.


 두 소녀는 존재에서도 이끌리지만 성적으로도 이끌린다. 마치 두 사람이 운명임을 명시하듯, 온전한 하나를 원하고 또 바란다. 물론 세상은 그런 바람을 이루어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부정하고 조롱하려 든다. 모욕하고 핍박하려 한다. 비정상, 광기, 치료의 굴레를 씌워 구속하고 가두려 한다. 


 두 소녀는 이 모든 것과 싸워 이겨야 한다. 단단하고 철통 같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자유와 사랑을 되찾아 와야 한다. 어떤 어려움과 마주하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거였다.


 진주.

진주는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의 손에서 빛을 내기 시작해,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 어울리는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세상의 너무 많은 이들이 진주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 '금전'의 가치로 사고팔기를 거듭한다. 진주를 아끼는 이조차 진주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돈을 생각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진주는 진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만 하고, 진주로서, 진주라는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아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건 뭘까를 되묻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사랑일까.

두려움으로 망설임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걸까.

 

 낙인찍고 싶지 않다. 

그 낙인의 시작이 혈통이든, 가문이든, 금전이든, 학력이든 그 무엇으로도. 

그러려면 더 열려야 하고, 더 단단해져야 하며, 더 커져야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으므로 결국 비워야만 하고, 포기해야만 하는 게 생겨날 거다.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면 언제나 하지 않는 걸 택하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렇게 포기해버리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이나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두 가지의 차이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포기와 후회. 감상의 마지막에 예상하지 못한 묘한 곳으로 오고 말았다. 정말 묘한 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훔쳐내고 싶은 게 언젠가 생기게 될까.

그렇다면 조금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나이 든 시간이 일분일초, 더 늙어지며 느리고 더뎌지기에.

끝나지 않은 두 소녀의 이야기, 그 뒷 이야기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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