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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24. 2017

달이 떠오른다, 살아야겠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이끌리는 거다.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발견 혹은 발견의 연속이다. 

발견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때로는 고민을 부르기도 한다. 

흔한 예를 들자면 새로운 책을 찾는 일과 이미 찾은 책을 다시 발견하는 일 사이의 고민 같은.


 세상은 읽을거리로 넘치고, 그걸로도 부족한지 점점 더 많아진다. 

다 읽을 수 없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십 억이나 되는 인간이 남긴 흔적을 한 인간이 자기 생에 다 읽어내는 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 인간은 없을 테니. 

 그럼에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사치스럽다고 할 고민에 이르게 되는 거다.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이 부른 덧없는 고민에. 


단순히 더 많은 책을 읽는 게 목표라면 문제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더 많이, 더 빨리, 새로운 걸 닥치는 대로 읽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망은 채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일에 간단하거나 단순한 건 하나도 없으니, 이 문제도 그리 쉽게 풀리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더 깊이' 읽고 싶다는 욕심이 동전의 양면처럼 뒤따르므로.

사실 더 깊이 읽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고, 읽기를 반복한다고 해서 깊이 있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험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 '세 번째' 읽을 때, '더 여러 번' 읽을 때마다 인상이나 깨달음, 생각이 달라진다고.


 특히 고전으로 분류된 작품들은 공통된 '생존(숱한 이야기, 책이 있었지만 그 수명은 저마다 다르다)'의 비결로써 시대와 국경, 사회와 성별을 뛰어넘는 공감과 깨달음을 준다. 이런 특징이 작품의 본래적인 것인지,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독자가 독자에게 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작품이 지닌 '가치'는 진짜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다.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고, 다시 읽은 책을 또다시 읽는 일의 거듭.


 근본적인 의미에서 거듭 읽기, 흔히 재독(再讀)은 '더 많이' 읽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횟수는 분명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걸 늘린다는 면에서는 '더 많이' 읽기를 방해하는 일이 된다. 

 이런 별 의미 없는 걸 적는 이유는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까를.


 그러나 다시 읽으며 생각한 건, 다시 읽기 잘했다는 거였다. 

과거의 내가 읽었던 <달의 궁전>은 지금의 내가 읽은 <달의 궁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걸 다시 읽은 셈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처음 읽은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더 많이 읽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래 놓고 다음에 또 고민하겠지. 

뭐, 달이 오늘 떴다고 내일 뜨지 않는 게 아닌데 아무려면 또 어떤가. 

그때의 고민은 그때의 나에게 떠 넘기기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달의 궁전>은 '포그'라는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래된 일, 열여덟 살부터의 3년 동안 있었던 일들. 유년기가 끝나고 성인으로 세상에 나가는 시기를 맞은 이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나이의 포그는 의욕보다는 깊은 회의를 품는다.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마치 이런 생각이 현실이 된 것처럼 포그는 점점 빈곤과 궁핍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굶주림과 열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신이 아직은 그를 부를 생각이 없었는지(실제로는 작가의 의도대로 된 거지만) 키티 우라는 여성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다. 키티 우와 연인이 된 포그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일자리를 찾는데 그때 만나게 된 사람이 에핑이라는 노인이다. 눈이 먼데다 반신불수인 에핑은 괴팍한 데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 했던 인물로 포그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며 기록하는 일을 시킨다. 

 구구절절이 줄거리를 적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럴 생각이 없으므로 중간을 건너뛴다. 

 한 때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포그는 키티 우, 에핑, 솔로몬 바버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아마도 그 후에는 자기의 삶을 살아갔을 거다.


 흔히 성장 소설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 혹은 청소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을 계속하는(육체적으로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특히 정신적의 의미로) 존재이므로 단순히 유년기의 치기를 벗고 성숙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은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르는 게 성장 소설이다. 그래서, <달의 궁전>에서도 포그만이 성장하며 자신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어떤 문제, 해결해야 하는 인생의 고민을 품고 살고 있으며 만남과 엇갈림, 갈등을 겪으며 저마다의 성장을 이뤄내는 거다.


 뻔한 얘기지만 '나'는 세상 누구보다, 무엇보다 소중하다. 문제는 이 소중한 '나'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세상과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남의 일처럼 간단히 생각하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출세를 하고 많은 돈을 벌고 큰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부와 권력과 명예가 곧 '나'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고민은 뒤로 미뤄두고 더 많은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삶을 위해 다른 사람들, 사회, 국가마저 배신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빈곤과 가난은 분명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궁핍은 인간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와 명예, 권력은 인간 삶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 여기서 존재의 고민이 시작되는 거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가족, 지위, 명예처럼 타고났거나 사회적 위치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예를 들면, 나는 아무개 씨와 아무개 씨의 아들입니다. 나는 00살입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합니다. 나는 무슨 차를 탑니다. 나는 어디에 삽니다. 


 혈연과 지위, 사회적 위치를 제외하고 난 후에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구와도 세상과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의 나는 누구란 말인가?

매운 걸 좋아합니다. 글을 씁니다. 종종 공상에 빠지고, 가끔 꿈을 꿉니다. 밤의 하늘이나 낮의 달,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걸 즐깁니다. 

 이제는 취향이나 취미, 성향도 제외해보자.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무엇이 남아있을까.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남은 건 있다. 

삶과 살아오며 경험한 일, 경험 속에서 했던 선택. 

이런 걸 적어본다면 내가 누구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폴 오스터의 소설 <달의 궁전>은 포그의 삶의 일부를 떼어다 적은 거다. 그 안에는 포그의 삶이 있고, 키티 우의 삶이 있으며, 에핑의 삶이 있고, 솔로몬 바버의 삶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얽혀있는 사람들의 삶이 모두 담겨 있다. 그들이 하는 말, 경험, 선택을 보며 읽는 이는 그들을 알게 된다. 그들의 미래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읽는 나는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의 삶을,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무엇을 느끼나, 어떤 걸 바라나.

 

 처음 <달의 궁전>을 읽었을 때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어렴풋이 좋았다고 느낄 뿐이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거였고, 다시 읽으며 '나'를 한 번 더 돌아보는 경험을 했다. 이야기 속에서 포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을 한다. 단 하나, 목숨만을 건졌을 뿐 가족도 돈도 없이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너무 많은 게 남아 있었다. 포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를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한 사람들도 살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모든 것이 다시 한번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이라고 다시 믿게 된 전부를 잃어버린 후에도 포그는 그 전처럼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거듭하기는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삶은 살아가는 동안 의미를 잃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솔직히 소설 인물의 삶이 극적인 반전 속에서 자기를 찾는 경험을 담고 있음을 발견한다고 해서 현실의 삶이 덜 힘들게 되거나 더 희망을 품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어떤 길고, 기막히게 기구한 삶이 담긴 소설보다 현실의 삶, 바로 나의 삶이 더 기막히고 기구하며,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기적적이라는 건 안다. 그런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의 삶이 그 이야기를 읽는 내 마음을 뒤흔들 수 있게 되는 거다.


 아직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은 조금 더 살아보기로 한다.

한 때 운명이란 건 확실하고도 확고하게 정해져 있어서 변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이끌리는 거라고. 매 순간 하는 선택, 마음먹은 생각들이 그 선택지를 오가며 삶을 이루게 되는 거라고. 


 '달의 궁전'은 중국 식당의 이름일 수도 있고, 떠오르는 달이 비추는 도시일 수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살며 완성해 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달의 궁전'에서 사는 게 달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건 달도 궁전도 아니고 나라는 이야기다. 

정말 그것뿐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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