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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ug 07. 2017

뼈는 죽지 않는다.

생명을 지탱하면서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뼈>_정미진

다 읽고 한참 지난 후까지도 감상까지 적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이런 의문을 떠올려 버렸다.


"그래서, 왜 뼈가 영원하다는 거지?"


조금 더 생각해봤다. 

분명 뼈는 수만 년, 심지어는 수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를 증명한다. 가죽과 뼈와 내장이 모두 썩어 사라진 후에도 적게는 수십 년에서 수억 년까지 세상에 머무는 거다. 

 

 뼈가 오래 남고 아니고를 따지거나 원리를 파헤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다. 

생각해보고 싶은 건 인간의 존재를 지탱하는 '뼈'를 인간이 얼마나 완벽하게 망각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거다.

연체동물들은 뼈가 없다. 그래서 중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흐물거리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모습을 혐오하는 인간도 있다. 


 '뼈'가 없다는 사실을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뼈가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형태, 동작, 생태가 혐오를 불러일으켰던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게 아닐까.

 

 뼈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까?
우리가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기준으로 삼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심정지', 다른 하나는 '뇌사'.

뼈를 못 쓰게 됐다고 해서, 뼈가 죽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뼈가 부러져 내장이나 혈관을 다치게 한다면 사망에 이를 수 있겠지만, 뼈를 제거하는 일이 생긴다고 해서 반드시 죽지는 않는다는 거다. 


 전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탄생과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뼈도 탄생하기는 하지만 죽음과 함께 죽지는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장이 멈춰 혈액의 공급이 그치고 난 후에도 뼈의 DNA는 간단히 파괴되지 않는다. 그나마 오래 남는다는 모발이 썩 고난 후에도 뼈는 남는다. 군더더기 없는 존재의 토대, 그것이 뼈가 아닐까. 

 우리는 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뇌나 심장에 '죽음'을 부여하듯, 뼈에도 그의 수고와 노력에 따르는 '마지막'을 새겨줘야 한다. 


 별 거 아니다. 그냥 의미 없이 주절거리는 혼잣말 같은 거다. 

뼈에 죽음을 선고하든 부여하든 그런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뼈는 알지도 못할 텐데.

삶을 사는 인간에게 '죽음'은 결정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일단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의미를 잃고 만다. 

죽은 자는 죽음 이후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오롯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는 거다. 

뇌사든, 심정지든, 사망이든 언제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이 소설 <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 괴기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잘못됐다'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어느 날에는 죽음을 맞을 텐데, 그러면 내 뼈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일단은 화장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심장이 먼저 죽든, 뇌가 먼저 죽든, 나의 죽음의 종결로 뼈까지 죽음에 이르는 게 적절할 것 같으니.

세상에 올 때 함께 왔던 모든 게,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게, 조금의 지체나 시간의 차이 없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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