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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ug 08. 2017

기억이 나를 배신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을 외면해 왔던 거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_줄리언 반스

잊고 지낸 기억이 떠올랐다.

수십 통.

어쩌면 백 통도 넘게 적어보냈던, 건넸던 편지의 기억이다.

말이 어눌하고, 쉽게 흥분해서 횡설수설하는 탓에 고백도, 마음을 전하는 일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적기 시작했던 게 편지였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수년이 지난 지금 편지에 어떤 이야기를 적었었는지 남아 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한 가지 기억나는 건,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기를 그러다 언젠가 지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필을 써서 적었다는 사실뿐이다.

 새삼 오래 전 적어 보낸 편지를 떠올리게 된 건 두 번째 읽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토니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스위치 역할을 했음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적어 보낸 모든 편지에 담긴 이야기가 미숙하고 어리석어 바보처럼 여겨질만큼 열렬한 고백으로 가득했길, 식어진 마음을 미워하고 저주하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였길 바란다.


 2016년 7월 오래 미뤄오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처음 읽었다. 그때 적은 감상의 내용으로 추측컨대 읽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장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어떤 이들은 불필요했다고 말하는 반전을 예감했고, 이야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에 두 번 읽을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해 읽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그랬던 책이었다.


 1년 후였던 지난 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주제 도서로 한 모임에 참석했다. '일독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평소였다면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고 참석했을테지만 1년 전의 기억, 두 번은 읽지 않을 책이라는 생각을 믿고 예전에 적어둔 감상만 두어 번 읽어보고 모임에 갔다.

 

 얼마나 아둔하고 어리석었던가.

고작 1년 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책의 줄거리는 물론, 각 구절에서 느꼈던 인상과 판단들까지 몽땅 잊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려 억지 논리와 얼토당토 않은 추측들, 주장을 늘어놓고 말았다.

 언제나 부끄러움은 나의 몫. 그 부끄러움을 자처한 게 나 자신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두 번은 읽지 않을 거라 장담하며 버리다시피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거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처음보다 더 빨리, 몰입해서, 흥미마저 느끼며 읽었다. 묘한 경험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의지해 내렸던 거의 모든 판단을 부정하고 새로운 판단으로 채워나가는 과정.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기억에 의지한 확신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반전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데, 반전의 힌트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이라는 것만 밝혀두기로 한다.

 이 반전이 필요했는가를 내게 묻는다면 분명 필요했다고 답할 생각이며, 그 반전이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몇 배나 강렬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말을 보태고 싶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불완전함과 한 번의 실수나 다름 없는 독한 말이 얼마나 지독한 저주가 되어 운명을 집어 삼킬 수 있는지, 시간의 흐름, 누적과 존재의 축적에 관한 철학적인 고찰과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폭 넓게 다룬다.

 토니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비슷한 말을 듣는다.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감을 잡지 못해 왔다, 아무 것도 모른다. '하는 식의 말이다.

 베로니카의 말처럼 토니가 소심한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세상에 자신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 나만 알지 못한다는 너무나 명백한 진실을 간단하고 속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스무 살 남짓되는 혈기 왕성한 시기였다면 더욱 더.


 베로니카는 토니가 거의 처음 사귄 여자친구다. 자부심이 강하지만 강한 자부심만큼 큰 열등감도 숨기고 살고 있는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자랑거리인 동시에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왕성한 성욕의 충족을 방해하는 베로니카의 엄격한 태도도 불만이었다.

 대부분의 연인이 겪는 시기를 베로니카와 토니도 겪게 된다. 권태, 의심의 시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의문을 품는다.


 "이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무엇이 하고 싶고, 원하는 걸까?"


이런 의문들에 현명하게 답을 내놓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하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라 많은 연인이 이 삐걱이는 시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멀어진다.

 토니와 베로니카도 버텨내지 못한 쪽에 속해 있었다. 다만 버텨내지 못한 게 토니였는지, 베로니카였는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는 불분명하다. 토니는 베로니카가 그랬다고 믿었고, 그렇게 기억했지만 베로니카는 그 반대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쪽의 기억에 의지한 진술만을 들은 우리들은 실제로 어땠는지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토니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토니는 참지 못한다.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게 정당한 권리라도 되는 듯 편지를 적어 보내며 저주를 쏟아낸다. 이후 불행의 씨앗이 되었을 그 저주의 편지를 바로 그때 적어 보낸 거였다.

 몇 개월 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온 토니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듣는다.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토니는 그 자살에 어떤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베로니카를 원망하는 마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삼았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 4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토니는 예전이나 다름 없이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으며 500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토니는 왜 자신에게 돈을 남겼는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갖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여기서부터 토니는 지금까지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사실이 아닐거라고 의심해본 적 없는 과거가 실제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비극적인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나름 똑똑하고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터무니 없는 비난이라고 믿어왔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하게 자신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줄리언 반스는 끝까지 작정을 하고 모순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 걸쳐 줄리언 반스는 이렇게 적는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


앞에서 '변화의 닫힘'을 이야기하고는 바로 뒤에서 '혼란'을 이야기한다는 건 분명 모순이다. 변화가 없으면 혼란도 없어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보다 앞서 이런 말도 한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린 말이다.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

더하면 늘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물어도 전혀 당연하지 않다고 답할 수 있는 것처럼 변화가 모두 닫히면 혼란도 없는 게 아니냐고 묻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책임진다는 거다.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나 혼자만의 기억을 다시 쓴다고 해서, 이른바 패자의 자기 변명을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실제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어느날 맞닥드릴 사실을 부정하고, 도망치느라 힘을 뺄뿐이다.

 

 글을 마칠 때가 되니 오래 전 적어 보낸 편지가 새삼 마음에 걸린다. 악담이나 저주는 없었더라도, 상대를 옭아매고 구속하려는 의도로 적었던 말이 적지 않았으리라, 그에 사과를 전하지도 미안함을 밝히지도 못하고 너무 오랜 시간을 잊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별 의미 없는 줄 알면서도 미안함을, 사과를 전한다. 나의 책임은 내가 지고 나아갈 것이므로, 무엇도 부정하지 않을 셈이므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세 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럴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불과 1년 1개월 전에 이 작품을 두 번 읽게 되지는 않을 거다라고 장담했었으니.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겸허히,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할 수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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