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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ug 21. 2017

그리고, 글이 남았다.

나무야 나무야_신영복 

<나무야 나무야>_신영복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나무야 나무야> 중.


이보다 나은 말을 찾지 못했기에 책 속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인용한 부분의 논리, 옳고 그름, 사실 관계를 따지지는 말기로 하지요. 요즘이라면 어린아이라고 해도 반론의 근거로 내놓을 장비와 기계가 차고도 넘칠 테니 말입니다.


 많은 문장 중에 앞선 표현을 가지고 온 이유는 '쇠의 자루가 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풀어내는 일이 좀처럼 쉬워지질 않는군요. 이미 어지러워졌으니 말을 조금 돌려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글을 읽고, 쓰는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유가 같다고 해도 같은 생각과 결론, 깨달음에 닿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글에 나를 비춰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춰보는 과정을 통해 나무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쇠의 자루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읽고, 쓰는 첫 번째 이유로 삼을만하지 않은지요.


<나무야 나무야>는 신영복 선생이 '당신'이라는 이에게 보내는 엽서 형식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이 '당신'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지인인 듯도 싶고, 책을 읽는 독자일 것도 같고, 사회의 어떤 계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이거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로도 읽힙니다. 또한 다른 누구, 타인이 아니라 신영복 선생 자신, 스스로를 가리키는 듯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과거, 역사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과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돌아보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책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을 모아 펴낸 것입니다. 뭔가 중앙일보라 하면 신영복 선생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 이건만 1년 넘게 연재한 걸 보면 나름의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거기까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또한 하나의 역설이 아니었을런지요. 책 속에서 말하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의 실천물로서요.


 어둠은 빛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조금 나아가면 어둠이 짙고 깊을수록 간절히 빛을 기다리게 되고, 기어이 만들어 내기에 이르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일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 그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전하려던 게 아니었을지.


신영복 선생은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라는 선언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유도 변화와 향상의 가능성을 굳게 믿고 있으며, 흔들리지 말고 나아갈 것을 권하고, 자신 또한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무야 나무야>는 어렵고 따분한 이론을 늘어놓거나, 주장을 펴기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담담한 자기 고백인 동시에 치열한 자기반성의 결과를 적은 것입니다. 

 

좋은 글은 우리를 닫힌 사고와 갇힌 시각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줍니다.


우리는 화가나 사람이 그린 것을 '그림'이라고 부릅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 '그림'을 '그리워함'으로 풀이합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 그리운 대상을 옮긴 것이 그림이라는 거죠. 한 마디로 '그림'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마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살림살이'라고 할 때 쓰는 '살림'이라는 말은 또 이렇게 풀어냅니다. '살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생(生).

살림의 근본은 살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이 비단 생명에 그치지 않고 뜻, 의지까지를 아우른다는 겁니다.

하찮을 수도, 가벼이 여길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살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두 번 읽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 읽을 때와는 또 다르다 하고, 세 번 읽을 때는 또 다르리라고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고정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음의 증거,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듯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서도 안 될 일입니다. 달라진다는 것, 달라질 거라 믿는다는 건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뜻에서 뜻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나아갑니다.  

앞서 이야기한 '살림'과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글쓴이는 더 이상 세상에 없으나 글은 남아서 뜻으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살릴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지혜를 구하고, 용기와 함께 하기를.


인용하며 시작했으니 인용하며 마치기로 합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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