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려면 남김 없이.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오래 전부터 정해둔 답을 내놓을 생각이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나 자신.”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나 스스로를 의심하겠다는 선언이다.
근거는 있다.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 자신의 평생을 경험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점이다.
믿음과 시행착오, 의심과 실패를 거치며 느꼈던 감정과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한 자신을 받아들여야 했던 인정의 시간.
그 시간의 대부분을 채운 건 오류와 변덕,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 혼란과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감정이었다.
‘알 수 없음.’
‘확신 못함.’
나는 행동하지 않았다.
솔직히는 행동할 수 없었다.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부러움도 느꼈다.
단호하고 당당한 사람들, 용감하게도 세상에 다른 사람은 다 못 믿어도 자신 만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동경심에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동경한다는 것도,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도, 그 어느 하나도.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망설이지 않았다면, 지금 머뭇거리기를 그만둔다면, 일단 시작해 본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한다면.
몸에 맞지 않는 작은 옷을 입는다면 숨쉬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입을 수도 없다.
큰 옷은 몸에 맞지 않아도 걸치는 건 간단하다. 접거나 걷어서 임시변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숨이 덜 막히고 임시변통이 가능하다고 해서 작은 옷보다 큰 옷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다.
마른 땅 위에 서 있다면, 길 위를 걷거나 뛴다면 큰 옷이 더 움직이기 수월할 수 있다. 하지만 물 속이라면 어떨까. 작은 옷은 몸에 꽉끼어 움직이기 어렵더라도 물이 차서 가라앉고 마는 익사의 지경은 면할 수 있다. 하지만 큰 옷은 헤엄치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넓은 면적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가기 쉽게 만들고, 물이 가득 차면 떠오르는 데 더 큰 힘이 필요해진다.
내가 느끼는 세상의 이미지, 인간 관계의 느낌은 마른 땅보다는 물 속에 가깝다. 망망대해 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간단히 육지에 닿을 수 있을만큼 가깝지는 않은 곳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는 거다.
큰 옷과 작은 옷을 비유로 든 이유는 작은 옷이 ‘나를 의심하는 것’과 같고, 큰 옷이 ‘나를 믿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생각이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 어제의 나를 다음 날의 내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나를 다음 순간의 내가 의심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거다.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스스로를 옥죄는 일은 답답하고, 괴롭다. 숨쉬는 일처럼 당연한 것. 사랑하고, 사랑에 빠지는 게 어려워지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솔직히 그런 일이 무척 잦다.
큰 옷을 입은 것처럼 자신을 믿는 일은 뭔가 너그러워진 것 같은 만족감을 준다. 큰 사람이 된 것 같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욕심도 나고, 야심을 품게도 한다.
피곤한 일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면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끊임없는 자기 확신과 근거를 찾아내야만 한다. 나로부터,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한다면 타인과 세상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타인의 이미지, 세상의 평판에 귀를 기울이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내게 스스로를 믿는다는 건 세상과 타인을 믿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세상은 의심 없이 신뢰하는 걸 미덕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게 미덕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왜?
‘의심은 나쁜 거니까.’
의심은 나쁜 거고, 믿음은 좋은 거라고 한다.
정말, 그런 걸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크건 작건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잘 안다’거나 ‘믿을만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
호의에서건 이익을 목적으로 했건 그들은 상대방을 믿었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믿었으며, 그들은 믿을만 하다고 믿는 자신을 믿었다.
믿는 사람이 어리석다거나, 믿음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다. 타인을 믿을 수 있는 건강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종종 다른 사람, 세상은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자주 우리는 속아 넘어간다.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나의 자기 의심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 기제’의 일종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방어 기제에 의지하는 태도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을 방해한다는 것도 아는 바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문제인 줄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말이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용기 없음을 무마하려는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믿는다.
지금까지 내내 스스로를 의심한다고 얘기해놓고선 이제와서 ‘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고 모순된 게 인간이다. 나는 이 이상의 설명을 내놓을 수가 없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나 역시 원하지 않는 뭔가를 당하는 걸 싫어한다. 당하는 걸 싫어하는 만큼 당하게 만드는 것도 싫어한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한데 한 때 좌우명이 이거 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지금은 비록 좌우명 정도의 비중은 아니지만 여전히 피해를 주는 건 싫다. 몰라서 피해를 주고 있다면 꼭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스스로를 의심한다는 건 적절하고, 타당한 조언 혹은 비판을 접했을 때 수정하고 고치기 위해 애쓴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의 생각이 다음 순간에 변할 수 있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타당한 지적, 정당한 비판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괴변일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 자기 인식을 말하면서 일관되게,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심한다는 건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 간단히 오류를 인정해 버려서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믿는 오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 또한 내 생각이지만 의심하기는 쉽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믿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잃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들 몫의 의심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는 착각도 나쁘지 않다(그것이 착각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면).
나는 거짓말이 싫다. 의심하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건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하나 같이 힘이 든다.
마지막으로, 나의 나에 대한 의심이 비관적이지는 않다는 얘기를 해두고 싶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하고 싶은 가’를 의심하는 거다.
‘믿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믿고 싶은가’를 의심하는 거다.
나의 의심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하나다. 무엇에게, 어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빼앗기지 않았다고 믿고 살아올 수 있었다.
작은 소망 하나를 말하자면 언젠가 이 의심들의 끝에 닿을 수 있었으면 한다. 어떤 거대한 믿음에 의해 의심이 밀려나든, 모든 것을 의심해서 의심의 끝에 닿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순간과 마주칠 수 있다면, 한 세상 잘 살았구나하며 눈감을 수 있을 것만 같으니.
의심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맑은 정신과 건강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의심이 독이 아니라 득이라는 건 이런 의미이기도 하다. 의심이란 성찰이며 관리다. 관심이며 주의다. 성의이며 노력이다. 그리고 애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