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싫어하는 말이 여러 개 있다.
‘하면 된다’는 말도 그 중 하나다.
‘하면 되는데 왜 하지 않느냐’는 말만큼 화를 돋우는 말은 드물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면 되는데 안한다’는 비난을 듣는 것만큼 우울한 건 없기 때문이다.
우울,
우울하다는 말은 하나의 금구다.
자주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위험해보이고 사회나 사람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우울감을 느껴도 병원을 찾거나 전문의에게 문의하기까지도 쉽지 않다.
정신과는 ‘미친 사람’이나 가는 거라는 생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정신과에 간다고 해도 간단히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좌절감,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우울해서는 아니었지만 정신과 진료를 받아본 적이 있다. 눈에 복시(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현상)가 생겨 안과 진료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검사 결과 눈에도, 신경에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지나가듯 심인성 증상일 수 있으니 정신과에라도 가보라는 말을 했다.
그냥 견뎌볼까 하다 견뎌서 더 나아질 게 없는 듯해 물어물어 정신과를 찾아갔다.
처음 방문에서 의사와 2분 여의 상담을 한 후 엄청난 문항의 설문지를 작성하고 3만원 남짓한 진료비를 내고 나왔다. 검사비가 3만원 남짓이었는지, 총 진료비가 3만원 남짓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치료와 상담을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설문에 답했지만 설문지는 외국의 진단지를 한국어로 번역한 걸로 보였고, 문항들도 심리학 서적에서 여러 번 봤던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형식적인 거였다.
진단 결과도 예측이 가능했는데 분명 내게는 얼마간의 정신과적 병리증상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주어질 거였다.
며칠 후 검사 결과를 받아보러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는 검사 결과의 몇 군데에 표시를 하며 진단 결과를 설명해줬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결벽(사소한 것이라도 법을 어겨서는 안되고, 규칙을 위반(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등)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강박))이 스트레스가 되어 심인성 증상들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지만 의사는 그런 나의 태도가 병적이라고 진단을 내렸던 모양이다. 3분 쯤 진단 결과를 설명한 후 의사가 내린 처방은 ‘신경안정제 복용’이었다. 약을 먹으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강박증상이 완화되면서 증상의 호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내게는 터무니 없는 처방이었다.
지키려고 했던 걸 약으로 무너뜨리는 게 치료라는 말은 ‘나’를 부정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부정당하기 위해 의사를 찾지 않았다. 눈의 불편을 해소할 단서를 원했던 거였다. 의사 앞에서 약 처방을 거부했고 진료실을 나섰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데 걸린 시간이 5분이 되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에 대한 하나의 환상이 깨지던 순간이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들, 심리,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진단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게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물론 조건은 붙일 수 있다. 모든 의사가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단서 말이다. 하지만 불과 몇 분의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하는 모습은 나를 이해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치료되어야 하는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전문가의 진단으로 환자가 되는 일. 그것이 진료비를 치르면서 얻은 결과물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행한 일, 약의 처방은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상담보다 빠르고 쉽게 증상을 완화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방식은 ‘하면 된다’라는 구호와 같은 식으로 작동한다. 바꿀 수 있는데, 노력하면 되는데 ‘네가 바뀌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책임지우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우울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힘을 내서 떨쳐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말들만큼 우울하게 만드는 말은 드물다.
어떤 목적이 있어 이렇게 쓰고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럴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일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약이 아니어도,
생생히 와닿는 온기와,
분명히 느껴지는 진심 하나면 충분하다.
삶이란 그처럼 소박해도 되는 거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하는 게 당연히 허락되어야 하는 거다.
그 반대의 일이 너무 슬프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