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다림 끝에서
지난 일요일에는 망울진 개나리를 봤고, 오늘은 목련 봉오리를 봤다.
개나리는 하천변 한가로운 곳에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는, 어쩌면 당연해서 감동까지 느끼지 못했다.
목련 봉오리는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가 지나다니는 길 가에, 건물 사이 좁은 틈에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감동에 가까운 인상을 안겼기에 저절로 일행을 부르게 했다.
"목련이 피네요!!"
조금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그런 목소리였을 테고,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긴 겨울을 견디고 맞은 봄이 아까운 날씨다.
정확히는 날씨가 아니라 공기라고 해야하겠다.
봄은 겨울보다 밝고 따뜻하지만 그 간극이 어느 계절보다 크다.
어제 풍경과 오늘 풍경이 다르고, 오늘 공기와 내일 공기가 또 달라서 매일매일 처음 맞는듯한 하루에 적응해야만 한다.
적응한다는 건 변화를 의미하고, 변하기를 즐기지 않는 이에게 변화의 계절은 여러 모로 처치곤란한 시기가 된다. 나처럼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인간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변해볼까 싶고, 변해야 한다 싶지만, 변해서 무얼하나 싶고, 변하기 싫은 마음도 만만치 않은 까닭에 갈팡질팡 하다 어지럼증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이게 다 계절 탓이다.
기분이 오락가락 하고 뭘 말하는지 알쏭달쏭 해서 뭘 얘기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느꼈다면 잘 읽고 있는 거다. 봄의 변덕, 같은 거라고 해두자.
사실 이야기 하려던 건 책장에서 오래 묵고 있는 마음에 짐 같은 책들의 시선 혹은 목소리에 관해서였다.
눈이 없으므로 시선이 있을 수 없고, 입이 없으니 소리를 낼 수 있을 리도 없으니 그 모든 건 그냥 '기분 탓'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지 못하는 건 지난 겨우 내 읽기에 게을러진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에서다.
가을 방학이라는 인디밴드의 노래 '가을 방학'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
처음 이 가사를 들었을 때는 어렴풋 하던 느낌이 이제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마음에도 총량이 있다.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려면 '싫은 걸 참아내는' 일은 되도록 적게 해야 하는 이유다.
기분 얘기에서 마음의 총량까지 건너뛰었는데 싫은 걸 참아내는 마음이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초과했을 때 느끼는 무력감을 알까 싶어서다.
몇 개월 전부터 어딘가 고장난 기분이었다. 고장날 거 같다고 느꼈을 땐 이미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수습을 위해 쏟을 여력을 잃은 후였다. 그때부터 주욱 악화일로였다. 조금 좋아지는 날이 있었지만 마침내는 더 나빠졌다.
'객관'이란 표현을 붙이기 어려워서 그만두었지만 '얼마나 읽었나'의 문제, 중요한 지표였던 '절대 독서량'이 터무니 없이 떨어졌음이 근거다. 지금도 조금씩 나빠지는 걸 느낀다.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간신히 발견한 즐거움의 끈을 자꾸 놓치기를 반복 중이다.
마음의 양식이던 책이 마음에 짐이 된 건 그런 '젼차'다.
탈출 방법은 사실 단순하고도 명백하며 간단하다. 조금씩, 꾸준히, 계속 읽어나가면 된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이다.
억지로 하기는 책 읽기라도 싫다.
여기서 싫어하는 걸 하나 더 늘리고, 그걸 또 참아내려고 하다가는 좋아할 수 있는 마음 따위는 남아나질 않을 거다.
그럼 조금 느긋해져야겠다는 결론만 남는다.
마음에 짐이 된 이유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이라면 마음에 짐을 내려놓기 전에 압박감을 풀어내는 게 먼저일 터다.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책이 읽어주기를 기다리다 지쳐 먼지가 되지도 않을 텐데, 왜 나만 조급한가.
다시 천천히 읽기를 시작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방법, '최종적 해결'을 위한 방법도 생각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