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우울은 소리 없이 찾아든다.

무언가는 반드시, 죽는다.

by 가가책방

한 기사에 실린 사진을 봤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떤 기사였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기사 제목은 대략 이런 거였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표정은 어떠한가?"

사진에 붙은 설명은 이런 내용이었다.

"자살하기 6시간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라는.


세상에 우울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예를들자면 '저는 우울해지는 게 취미예요.', 라거나 '저는 하루라도 우울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라거나 '제 우울함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우울함 자체는 기쁨이나 슬픔처럼 자연스러운 거다. 소리 없이 찾아오기에 자신이 우울한지도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 우울하다고 해서 모두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우울증의 세계는 가까운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고도 멀다. 적어도 스스로가 우울감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동안에는 안전하다고 믿어도 된다.

기사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서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6시간 전까지도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던 남자는 홀로 나가 목숨을 끊었다.

남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비사교적이지도, 표정이 굳어있거나 슬퍼하지도, 직업이 없던 것도, 빚에 시달렸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왜였을까.

왜 우울증에 걸렸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알 수 없는 건 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다. 그들이라면 기꺼이 들어줬을텐데, 그렇게 보내기를 바라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고양이가 산다. 정확히는 고양이들이 살았었다. 출퇴근 길 지하철 역에서 나올 때와 들어갈 때면 꼭 살펴 보게 되는 그런 고양이들이었다.

중성화 수술을 마친 삼색 암컷 고양이와 엄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혼자 남은 어두운 색 얼룩 고양이였다. 누군가는 매일 밥을 챙겨줬고, 종종 캔과 간식이 제공됐으며, 발톱을 긁을 수 있는 스크래처도 갖춰져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았다. 고작 고양이 두 마리가 이틀째 안 보이는 것뿐인데도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쓰였다.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걸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잠시 걱정스런 마음이 되기도 한다.


매일 보는 고양이도 보이지 않게 되면 이렇게 궁금하고 마음이 쓰인다. 매일 보던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까.

고양이 만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뭔가 쓸쓸한 기분이 들 것만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고양이들은 매일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고양이를 매일 보던 사람들은 고양이를 생각하는데, 정작 떠나간 고양이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고양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쓸쓸함은 누구를 위한 기분이었던 걸까.

고양이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이라고 해도 일부의 사실일 거고 말이다. 그 기분은 고양이를 보지 못하게 된 나, 사람을 위해 느끼는 기분일 거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늘 있던 자리가 비었을 때 느끼는 허전함, 마음의 공백,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쓸쓸함이 일어난 거겠지.


인간은 우울하기보다 명랑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함은 그냥 젖어들면 되지만 명랑함은 그 우울함을 이겨내는 데 에너지를 써야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을 거란 얘기다. 태어나고 자라기를 명랑하고 밝은 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적지 않을 거다.

우울함이 우울증이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억지스럽게 웃음으로 우울함을 이기려고 하다가 고갈되어 텅 비어버리고 마는 일. 그게 우울증의 시작 아닐까.


우울증이 정말 무서울 때는 자신이 우울증이란 걸 모를 때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있잖은가.

"나는 내가 아픈줄도 모르고."라는.

우울한 줄도 모르고, 우울증인 줄도 모르고, 그냥 자신을 가눌 수 없어 괴로워하다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목숨을 끊게 되는 게 아닐까.

인지란 괴로움을 느끼게 할 수는 있지만 괴로움이 삶을 자각하게 하기도 한다. 인지하지 못하고, 괴로운 줄도 모르고 괴로워하는 일. 그건 얼마나 큰 괴로움일까.


연례 행사처럼 가끔 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왜 사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생각하는 일이다. 사실 사는 이유라며 내놓을 것 없이 계속 살아왔기에 이제 와서 무슨 특별한 이유가 떠오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좀 더 공허하다고 느낀다.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책은 즐거움이기 보다 괴로움이 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나마도 전보다 터무니 없이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양이 뭐 중요한가, 질이 중요하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을텐데,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많아야 하고, 양이 적으면 질이라도 높아야 하건만, 양은 적고 질도 떨어지는 게 현 상황이다보니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유일한 낙이었던 글도 쓰지 않고 있다. 쓰지 않는 건지 못쓰게 된 건지 어느 쪽이든 글쓰는 사람으로서는 형편 없는 일이라 변명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게 또 기운을 깎는다.


살아가는 의미라는 건 거저로 생겨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쥐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 삶의 의미는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생겨나지도, 지켜낼 수도 없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방법은 읽고 씀으로써 길을 찾아가는 거였다.

지금은 길을 잃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알 수가 없다.


살아갈 의미를 잃은 인간은 가련한 존재로 전락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나란 인간은 그렇다는 얘기다.

나는 좀 우울하다. 우울했고, 당분간은 우울할 것 같다.

우울함을 이겨낼 생각은 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좀 더 깊이 젖어서 저 아래까지 잠겼다가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다.

이 과정이 새삼스럽지 않으므로 나는 괜찮을 걸 안다. 괜찮지 않을 건 세상이라는 것도 경험으로 안다.


우울할 때면 몹시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날카롭고 예민해진다. 평소에도 비교적 날카롭고 예민한 편이라 이때는 보기만해도 짜증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걸 참을 수 없을 때는 사라지기도 한다. 어린아이나 다름 없다.


나도 참 질리도록 자라지 않는다.

세상 앞에 좀 더 담담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갈 길이 멀고도 멀다.

괴테, <파우스트>는 시작하며 이렇게 적는다.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다."

나는 애쓰는 중이다.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뭐, 이미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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