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을 말하는 데 능숙해지기 싫다.
'안녕'을 말하는 데 능숙해지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가 '안녕'을 말하는 데 능숙해지기 싫다고 바꿔 적었다.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의지가 다르기에.
익숙해지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능숙해지는 건 의지로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오늘은 즐겨 가던 브런치 카페가 마지막 영업을 하던 날이었다.
좋아하던 메뉴를 마지막으로 먹고, 더하여 주신 커피와 차까지 맛있게 마시고 왔다.
지인인지 단골인지 몇 사람인가 들러서 꽃다발과 인사를 전하는 모습도 봤다.
즐겨 먹던 메뉴를 다시 먹지 못하게 된 아쉬움도 있었지만 종종 찾아올 공간이 사라진다는 아쉬움이 제일 컸다.
세상에 찾아갈 곳은 많고도 많지만, 특별하게 느끼는 장소는 많지 않다.
내가 '아는' '편안하고 익숙한 장소'.
드물게 생겨나는 그런 곳을 잃는 건 언제나 아쉬운 거니까.
나는 좀처럼 어디에 정을 붙이는 편은 아니다. 많아도 일 년에 한 곳이나 생길까 말까.
사람에게도 비슷한데, 원래 성격인 건지, 그렇게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나는 첫 번째 장소는 이발소다. 지금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일이 거의 없지만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머리는 이발소에서 깎는 줄 알고 살았다.
중학교 때다. 우연히 알게 되어 3년쯤 다닌 이발소가 있었다.
50 중반쯤 되는 이발사 아저씨는 특별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계셨는데, 종종 내게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너는 나중에 개그맨이나 해라."
어리고 수줍음 많고 낯을 가리던 나는 물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응을 해드리는 게 예의라고 여겼기에 '네?'라고 의문을 표시했던 기억이 난다. 아저씨는 별 이유나 근거를 말하는 일도 없이 혼자 웃으셨다.
"하하하."하고.
그 웃음이 통쾌하다거나 정말 웃겨서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아저씨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한두 번 더 개그맨이 되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같은 반응이었다.
어쩌면 머리 깎으러 오는 중학생들 모두한테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 말이다.
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올라왔을 때, 이발소가 있던 자리에 고깃집이 생겨있었다.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몇 년이나 머리를 깎으러 갔던 이발소가 사라지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후에 마음에 드는 이발소를 다시 찾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정확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세 번 이상 찾아간 이발소가 없었다. 나름의 충격이었던 걸까. 고민하지 않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언제나 거기 있을 거라 믿었던 공간'이 그렇게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런 현실의 충격 말이다.
대학교 때는 단골 떡볶이 집이 재개발에 밀려 사라졌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릴 때쯤이면 마음에 들었던 공간이 꼭 사라지곤 했다.
별 것 아니지만 그건 하나의 이치였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 옛말이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
올해는 벌써 두 곳째다.
한 곳은 독서모임이 있어 자주 가던 커피와 샌드위치가 맛있던 카페였고, 다른 한 곳이 오늘 마지막 영업을 한 브런치 카페였다.
가속하는 건 우주의 팽창 속도와 노화의 속도만이 아닌 모양이다.
크게 실망했다거나 좌절해서 다시는 마음에 드는 장소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 따위를 늘어놓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치대로 생겨나고 또 때가 되면 사라질 테니 말이다.
나는 다만 시작하며 적었듯 능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사람과의 '안녕'에 말이다.
공간이라고 적었지만, 사물로 존재하는 공간은 적어도 내겐 별 의미가 없다. 그 공간에 갔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분위기, 정서와 교류가 중요한 거다. 별 말하지 않고 근황을 묻는 정도의 시큰둥한 대화라도 그 순간이 충실하게 느껴지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런 공간이 마음에 들게 되는 거고, 종종 찾게 되는 거다.
나이를 들면서 '안녕'을 고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고 혹은 병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은 사람들과의 이별에도 조금씩 담담해진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는 익숙해질 수 없지만 세상의, 타인의 죽음에는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 조금은 잔인하고 냉정하게 들리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익숙해질지언정, 능숙해지지 않는 일. 처음 겪는 것처럼 얼마간 멍청해지는 일. 그게 내 나름의 애도의 방식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하는.
마음 붙인 이들이 언제든 불쑥 찾아갈 수 있는, 언제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공간.
<피터팬>의 '네버랜드'도 아니고, 그런 공간이 있을 수는 없겠지.
그 세계가 나이 들지 않더라도 내가 나이 들어갈 수 없게 될 테니.
오늘 문득, 마음에 들었던 공간과 공간을 지켜주었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이제는 사라진 공간에, 앞으로 만나고 헤어질 공간의 안녕을 묻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아서 살아가는 한 만나게 된다고 하니, 그때를 위해 인사를 아껴둔다.
별 것 아닌 말, '안녕'이라는 말이 오래오래 능숙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안녕'에 능숙해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흩어질 기억의 한 페이지 대신 이 곳에 기록하다.
2017. 0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