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_이승우
지난봄의 일이다.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를 추천받았다.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뒀다가 읽는 생활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본의 아니게 반년 넘는 시간을 보낸 후, 그러니까 신간이 구간이 된 지금에야 읽게 됐다.
큰 기대는 없었다. 처음 읽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부터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읽은 <식물들의 사생활>은 더 좋지 않았다. <식물들의 사생활>이 처음 읽은 작품이었다면 다시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됐을까 싶기도 했다. 세 번째로 읽은 작품이 지금부터 감상을 적어볼 <사랑의 생애>다.
“좋지 않았다면서 왜 계속 읽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고 있기에 그나마 읽어나갈 수 있었다.”라고 답할 생각이다.
이승우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독서 모임에서도 많은 분들이 아끼는 작가로 꼽고 있었다. 그런 분들이 보기에 나의 시각은 삐딱해서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시피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생겨나고, 자라며, 생각하고, 판단한다.
내가 나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듯,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내게 강요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승우 작가가 종종 얘기하는 ‘다양한 사랑’을 이해하듯, 다양한 의견, 견해, 판단, 해석을 지켜봐 주길.
<사랑의 생애>는 물론이고 다른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에서 느낀 점은 문장을 참 잘 쓴다는 거다. 짜임새가 있다고 할까? 앞의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어색함이 거의 없다. 공들여 문장을 쓰는 장인 정신 같은 게 느껴진달까.
다른 책의 짧은 감상에도 적었었는데, ‘웰메이드 작가’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작가다.
그런 문장력, 전개에도 불구하고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아주 명확한 이유다.
문장 둘을 인용할 생각인데 그전에 간단히 설명을 해두기로 한다.
<사랑의 생애>에는 선희라는 여자와 형배, 영석, 준호라는 남자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선희는 형배를 사랑했지만 형배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선희를 다시 만난 형배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선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을 고백한다. 선희에게 그 고백은 무척 당황스러운 것이었는데, 이미 영석이라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형배를 향한 사랑도 끝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선희가 사귀는 영석이라는 남자는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고, 선희와 사귀기 시작하면서는 강렬한 집착과 두려움, 의심에 시달렸다.
여기까지가 다음 문장을 읽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이다. 인용할 문장은 이렇다.
선희가 영석으로부터 여러 번 상처를 받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로부터 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실은 그 자신이었다.
154~155쪽.
그러니까 이 불길의 피해자는 선희만이 아니라 영석 자신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가장 큰 피해자였는지 모른다. 영석은 선희를 괴롭혔지만, 그 괴롭힘을 통해 더 큰 괴로움을 당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249쪽.
어떻게 느껴지는지 궁금하다.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묻고 싶다.
선희의 헌신으로 영석을 떠나는 대신 이해하려고 하고 받아들이려는 과정을 지나온 후다. 선희는 자신이 고통스러움을 느끼지만 영석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선희는 영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희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영석이 선희보다 더 큰 상처를 받고, 더 큰 괴로움을 당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낭만적인 사랑, 헌신적인 여성상, 한 여자의 희생으로 좌절하고 절망한 남자가 구원받는 결말. 그 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일 리 없는 이들의 만남의 어디가 아름다운가.
영석이 불쌍하다, 선희가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노력하면 영석도 조금은 나아질 거다.
정말 낭만적인 이야기다.
내가 이승우 작가의 ‘사랑타령’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의 희생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여성들을 괴롭히는 원흉인 남자도 사실은 고통스럽다고, 어쩌면 더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 괴롭히는 사람이 더 괴로울 수 있다는 논리는 잘못된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영석은 본인의 문제, 본인의 괴로움, 본인의 고통, 본인의 상처이기에 처음부터 피할 수가 없었다. 본인의 상처를 100이면 100 짊어지고 살아가거나, 치료를 위해 애쓰는 게 그의 삶이다.
선희는 다르다. 영석의 고통, 괴로움, 상처는 선희가 안겨준 게 아니다. 선희는 상처의 1에도 책임이 없다. 조금의 책임도 없는 상처 때문에 선희가 조금의 고통이라도 겪게 된다면 그건 부당하고, 부조리한 게 된다.
“스스로 영석의 곁에 머물기를 택했으므로 책임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선희가 선택한 건 고통을 받는 게 아니라 곁에 있어주는 거다. 곁에 있겠다고 해서 고통까지 받겠다고 한 건 아니라는 거다.
조금의 책임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상처가 자꾸만 늘어가는데, 영석이 더 고통스럽고, 더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게 무슨 변명이 되고 이유가 되는가?
이런 논리의 구조는 여성 혐오를 정당화하는 구조와 닮아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 뭘 하시든가’ 라거나, ‘여자도 이러저러하지 않느냐’ 거나 ‘남자만 책임이 있는 거냐’ 라거나,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는 논리의 구조 말이다.
틀린 건 아니다. 적어도 완전히, 모두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도, 정당한 것도 아니다. 그 차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셈이란 걸 깨닫게 한다.
괜히 민감하게 구는 게 맞다. 민감하게 굴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는, 전혀 생각도 못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의 구약을 보면 언제나 신의 제물이 되는 건 가장 순결한 어린 양이다. 나이 든 양도 아니고, 가장 튼실한 양도 아닌 가려낸, 어린양이 희생양이 된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 희생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말이다.
물론 선희가 완전무결하게 선하며 순결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고통받고 상처 입는 당사자인 선희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적고, 고통을 주고 상처를 입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다는 게 이상하다는 거다.
모든 사랑이 다 사랑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얼마쯤 양보해서 모든 사랑이 다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랑은 드러나기 전까지만 사랑일 수 있다. 짝사랑, 외사랑은 분명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강요하고, 요구하는 순간 폭력으로 변모한다. 폭력에는 낭만도, 명분도 없다. 상처는 상처고, 괴로움은 괴로움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간절하면 전해질 거라고, 진심은 이어지는 거라고 믿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역시 강요할 수는 없다. 내내 착각하고 있다가 깨닫게 해주면 그때서야 ‘몰랐다’고 말을 한다. 그건 그냥 변명일 뿐 다른 무엇이 되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때렸으므로 나는 때리지 않았거나 때리는 것 혹은 맞는 걸 몰랐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때린 사람은 당신이고, 당신이 때린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맞아 상처 입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안에 사랑이 기생하기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면서 사랑의 생애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사랑이 기생하는 숙주가 사랑에 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기생 하 듯한 사랑을 한다면 기생하는 사랑의 숙주가 된 사람은 도대체 몇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걸까?
숙주에 기생한 사랑에 더해 자기에게 기생하는 숙주가 있고, 거기에 자기를 숙주로 삼은 사랑까지 있으니 셋을 책임져야 하는 걸까?
역시 옳지 않다. 기생하는 사랑, 상처 주고 괴로움을 주면서 자신이 더 상처받고 더 괴롭다고 말하는 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할 짓이 못 된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에는 이런 구조,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의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상처 주는 사람이 더 상처받는다는 것도, 고통을 안기는 사람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도 일관되어 있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사랑이 다 사랑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랑이 다 아름답고, 정당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랑이 지켜져야 하고, 지켜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숙주 안의 그 무엇이 생을 끝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다.
첫째는 숙주의 생이 끝나는 거다. 비극이다.
둘째는 숙주가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거다. 사랑의 생애만이 끝나는 거다. 다행이다.
스스로를 해치는 걸 두고 사랑이라고,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말하지 말자. 희생은 살려낼 때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암세포는 나의 몸에서 생겨난 ‘나의 것’이지만 지나치게 커지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랑이 사랑에 빠진 이를 숙주로 한 생명이라면 사랑은 숙주보다 커서는 안 된다. 그게 내 생각이다.
우리의 사랑은 나보다 클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은 나보다 커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